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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리핑] '재벌냉면집'과 사라진 노포(老鋪)

작성자
hwlee8
작성일
2019-01-23 07:14
조회
151


고백하건데 지난 여름을 견딘건 팔할이 광화문 인근 냉면집 덕이다. 심심한 육수에 메밀함량이 높아 가위 따위 필요치 않은 평안도의 맛. 정수는 단연 육수다. 허영만의 '팔도냉면 여행기'편에 따르면 평양냉면은 그야말로 고된 노동과 기다림의 산물이다. 주인공 성찬이 운암정 승부 때 사용한 레시피를 보자.

양지, 사태, 삼겹살, 늙은 닭, 마구리 뼈와 돼지 등뼈…. 삼겹살은 30분 삶고 건져 적당 크기로 잘라 다시 넣는다. 무, 감초, 청양 고추, 대파, 양파, 생강, 마늘을 자루에 담아 함께 끓이고 두꺼운 거품부터 걷어낸다. 다시 얇은 거품과 노란색기름은 걷어내고 무색의 기름은 남겨준다. 진국이 나온다는 신호다.

이렇게 1시간 30분. 첫번째 육수를 빼면 다시 물을 보충한다. 다시 30분 후 야채를 건져 5년묵은 천일염으로 간한다(간장은 냄새가 날 수 있다). 또 15분을 끓여 삼겹살을 먼저 꺼내 찬물을 넣는다. 기름걷기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20분 더 끓여 사태를 뺀다. 다시 물을 보충해 10분 후 양지를 뺀다. 10~20분 더 끓여 늙은 닭과 뼈를 뺀다. 마무리로 잡내를 없애기 위해 소주 한 병 반.

처음부터 물을 많이 붓고 계속 끓이면 편하지만 맛이 천지차이다. 노계도 배쪽이 위로 보이게 집어넣는 세심함은 필수다. 다시 '지른다(육수를 빼는 것).' 먼저 지른 육수에 두 번째 육수를 합쳐 찬물에 식힌다. 여기에 100% 순메밀을 손수 반죽한 면이라면 게임 끝이다.

남한 평양냉면의 시작은 1940년대 을지로4가의 서래관으로 알려진다. 도시계획으로 두개로 나뉘어졌다 결국 사라졌다. 냉면애호가로선 아쉽다. 이런 마음에서였을까. 최근 을지면옥을 통해 '노포'(老鋪) 철거 논란이 일자 박원순 시장은 세운3구역 재개발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반전은 이제부터다. 시행사인 한호건설은 을지면옥 일가가 합의를 깨고 3.3㎡당 2억원의 토지보상금을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을지면옥이 가게 이전 용도로 구입한 일대 5층 빌딩의 존재도 공개했다. 일체 부인하던 을지면옥 측은 대표 명의의 정비사업 추진 동의서가 공개되자 입장을 바꿨다.

사업지연 손실이 불어날 구역 내 중소토지주들은 서울시가 '재벌냉면집'을 위해 영세 토지주의 목줄을 죈다며 비판하고 있다. 박 시장의 한 마디에 도심 고밀 개발로 주택공급을 늘린다는 정책 신뢰도 떨어졌다.

을지면옥의 토지보상금이 얼마든 탓할 건 아니다. 애초 시행사와 토지주 간 협상의 영역이다. 해당 구역은 동의율을 충족해 2017년 4월 서울시의 사업시행 인가를 받았다. 을지면옥 등을 비롯한 일부 토지주가 무효확인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협상도 소송도 사업자 간 결자해지할 문제다. 남의 협상테이블에 눈치없이 끼어들어 혼란을 부추긴 서울시만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다시 냉면으로 돌아가자. 서래관은 사라졌으나 1946년 서래관 동업자 장원일씨가 냉면기술자 주병인씨를 만나 우래옥을 열었다. 우래옥의 성공으로 70년대 평양냉면집들이 속속 생겼다. 을지면옥도 그 하나다. 사라진 서래관이 씨뿌렸다해도 과장은 아니다. 노포의 '맥'(脈)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리가 음식을 만들겠나.

© MoneyToday 김희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