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칼럼] 취하는 것

술이 왜 있을까?

한동안 그게 의문이었다. 그러나 술꾼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외심마저 들 때가 많았다.

그들이 있어야 우리가 있을 수 있었다. 우리집이 한때 선술집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공원의 ‘가고(상자) 부대’(들병이 영업을 하던 아낙들)를 주 거래처로 하던 주류 도매로는 제대로 수지를 맞추기가 어려워지자(길 맞은편에 새로운 경쟁업체가 생기면서 거래처가 반으로 줄었다), 직접 홀 가운데 바를 하나 설치해서 선술집을 열었다.

낱잔 소주를 파는 소매로 나선 것이다. 서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시쳇말로 소주 칵테일 바였다.

맥주잔만한 큰 소주잔 한 잔에 5원이었던가? 주정을 사다가 아버지가 직접 제조한 ‘싸고 순한 소주’는 할 일 없이 공원 주변을 맴도는 주당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는 진로든 금복주든 백구소주든 모두 30도 소주 일색이었고, 고량주는 45도였다. 아버지는 22,3도로 도수를 크게 낮추어서 주조(酒造)를 했다. 그때는 엄연한 ‘밀주 장사’였다. 범법이었지만 고객들이 그 맛을 사랑해서 별 탈 없이 장사는 계속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소주는 뒤끝이 깨끗하다는 평을 받았다.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던 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주당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소주맛뿐만이 아니었다. 모여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객담을 나누는 재미도 꽤나 소소했는지, 단골손님들도 많았다. 주로, 한때는 잘 나갔으나 지금은 찬밥 신세인, 낙일거사(落日居士)들이 많이 모였다. 그렇게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버지의 공원 앞 선술집은 그들에게는 ‘작지만 실(實)한’ 소확행의 장소였다.

아버지의 단골손님 중, 젊어서 교편을 잡았다는 키가 작고 단단한 몸집을 가진 유씨 아저씨라는 분이 있었다. 그 양반과 동래고보 축구부 출신의 양아치 대장 ‘변상태’ 아저씨가 아버지의 손님 중에는 단연 위엄이 있었다.

주당이라면 누구나 취하면 취할수록 말이 많아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 양반들은 그렇지 않았다. 화장실 볼일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우는 아버지 대신 내가 소주 주전자를 들고 여기저기, 올망졸망, 달랑달랑, 빈 잔을 채우러 다니던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도 그 두 양반은 말없이 그저 술잔만 앞으로 조금 밀 뿐이었다. 간혹 내 뒤통수를 한 번씩 쓰다듬는 일이 있기도 했었다. 변상태 아저씨는 가끔씩 말을 걸기도 했다. 내 팔을 자기쪽으로 잡아당기며 ‘이찌방?“이라고 농담도 건넸다. 아마 아버지가 아이들이 공부께나 한다고 자랑했던 모양이었다. ‘공부 잘 하냐?’는 말이었다.

변상태 아저씨와는 좀 격이 다른 유씨 아저씨의 카리스마 있는 위엄은 주당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외감마저 동반한 채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었다. 행색도 그중 가장 멀쑥했다. 아무도 그에게는 농지거리를 함부로 던지지 않았다. 오직 50여명의 양아치(넝마부대)를 수하에 둔, 대여섯 살 연상인 변상태만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떠도는 말로는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의 소주방 고객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저 무성한 소문만 즐길 뿐 실제를 소유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소문의 진상이 만 천하에 드러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변상태가 주워서 키운 양아들인 ‘백인종’ 덕구가 양아버지 변상태를 공공연하게 갈구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덕구는 얼굴이 너무 하얘서 백인종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수십 명의 어린 식구를 거느린 양아치 부대의 실질적인 보스였다. 몇 년 전 변상태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때 더 이상 술꾼인 변상태에게 대식구의 살림살이를 맡겨둘 수가 없었다고 그는 주변에 알렸다.

그러나 공원 주변의 사람들은 덕구가 양아버지 변상태를 젖힌 것은 아이들보다는 새로 만난 인연과 함께 제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여자가 그렇게 요구했다는 소문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덕구가 젊은 과부와 살림을 나겠다고 했을 때 주제넘게도 변상태가, 그 과부의 행실을 문제 삼으며 강하게 말렸다는 거였다.

이삼 년 전, 멀리 어디서 수재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와서 공원 옆 공터에 임시거처를 짓고(나라에서 지어줬다) 거주한 적이 있었다. 그 수재민들 중 한 집에서 오자마자 초상이 난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집 과수댁인 모양이었다. 소문이 계속 좋지 않게 나던 인물이었다. 변상태는 순순히 덕구의 모반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얼굴에 난 시퍼런 멍을 애써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소주방이 그의 종일 근무지가 되었다. 종일토록 시도때도 없이 술만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늦은 시간까지 변상태와 유씨 아저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공원 앞 가게의 특징은 해가 지면 고객들도 일제히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소주방이 고즈녁한 기운이 낮게 가라앉아 있던 때였다. 어둑어둑한 신작로에는 굵은 장대비가 한번 지나간 뒤, 가늘게 부슬비만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눈을 내리 깔고 길바닥 쪽만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유씨 아저씨가 갑자기 냅다 술잔을 내던지더니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백인종, 너 이 쌔끼 거기 서라우!”
비를 맞으며 가게 앞을 잰 걸음으로 지나치려던 덕구가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야 이 썅놈의 쌔끼야, 나 좀 보고 가라우!”

유씨 아저씨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덕구는 어릴 때부터 권투를 해서 몸이 민첩했고, 키도 훤칠했다. 생긴 것도 깔끔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혀 양아치 대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입과 손은 마냥 거칠었다.
“이놈의 영감쟁이가 웬 지랄이고?”

달려드는 유씨 아저씨를 향해서 덕구가 냅다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유씨 아저씨의 몸이 쓰윽 덕구의 품 안으로 안기는가 싶더니 덕구의 몸이 크게 ‘사카다찌(아버지의 표현이다)’ 했다. 크게 원을 그리며 덕구의 그 긴 몸뚱아리가 진흙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저녁 무렵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의 가게에 나와 앉아있던 내게는 신기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중에 그 비슷한 이미지를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1999)의 라스트신에서 봤다. 인간이 벌이는 몸싸움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덕구는 그 한 번의 큰 기술로 완전히 제압된 듯했다. 꼼짝을 못했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채로 유씨 아저씨의 훈계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유씨 아저씨는 그렇게 자신의 무도(武道) 교사 이력(본인은 그렇게 주장했지만 순사 출신이라는 말도 떠돌았다)을 소주방 친구 변상태를 위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유씨 아저씨의 분투(奮鬪)에도 불구하고 변상태는 그해 겨울 공원 뒷길에서 얼어죽고 말았다. 유씨 아저씨도 술을 끊었는지 그 뒤로는 우리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변상태가 죽고, 과수댁과 살림을 차린 덕구도 후배 용구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그곳을 떴다. 우리집도, 어머니의 빈대떡으로 권토중래를 노렸지만(경쟁자의 신고로 즉심에 넘겨져 벌금만 물었다. 불법으로 내건 화덕이 문제였다),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그곳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도 술을 잘 마실 거라고 생각했다, 동래고보 축구부 출신 양아치 대장 변상태나 왜정 시절 무도 교사였다는 유씨 아저씨처럼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쓸쓸하게 늙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선술집 아이가 그 출신성분에 어울릴 만큼의 주량은 가질 것이라 당연히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체질이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취하는 것이 어디 술뿐이야, 아버지도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당신이 만든 술로 많은 사람들을 기분좋게 취하게 했다. 그러니, 나도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지만, 술 한 잔 권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로, 여러 사람들에게 ‘취하는 것’ 한 잔(편) 권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면 될 일이다.

글글:양선규교수/대구교육대학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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