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매력

오늘은 그림책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저희들 어렸을 당시에는 책이 귀했습니다. 저희 집에도 볼만한 책이 없었습니다(졸작 『감언이설』 참조).

초등학교 때 저의 주 독서물은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만화(2원 주면 3권 보여주는)가 고작이었습니다.

저의 정해진 하루 독서량은 만화 세 권이었습니다. 하루 용돈이 딱 그만큼이었으니까요.

만화도 ‘그림책’이라면 ‘그림책’이겠습니다만 우리가 ‘선데이서울’을 ‘책’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만화를 굳이 ‘그림책’이라고 부를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그림책’의 다양한 내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교과서 말고 제가 초등학교 때 본 책 중에 유일하게 기억이 남아있는 ‘책’은 『재미있는 자연 이야기』라는 책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거래처 사람에게 받은 것이지 싶은데 제법 잘 그린 삽화도 있고, 궁금했던 자연현상들을 ‘재미있게’ 과학적으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열 몇 권으로 된 시리즈물이었는데 두고두고 손떼를 묻혀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물론 정통파 ‘그림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림책’은 그림이 스토리텔링의 주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 책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림보다는 글자가 월등히 많은 ‘글자책’이었습니다. 저의 독서 이력은 그렇게 ‘그림’을 건너뛰었습니다.

본격적인 독서는 중학교 때 경험했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작은 활자가 2층으로 빽빽하게 인쇄된 와룡생 무협지를 주로 읽었습니다.

군협지, 사자후, 무명소, 천애기, 무유지, 표향령, 협골관, 의협지, 마적, 쌍봉기, 금검지, 비룡, 비연 등등(인터넷 검색으로 다시 알아낸 제목들입니다.

강설현상(무유지), 철적신검(의협지) 옥차맹(군협지) 비연경룡(비룡) 같은 원제목들도 나와 있네요) 하루 저녁에 한 권씩 몇 달에 걸쳐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나중에는 무협지에 관해서는 거의 ‘작가’ 수준의 ‘구라빨’을 구사하기도 했습니다(무협지깨나 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겁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 무협담론이 깊숙하게 들어오곤 했습니다. 주요한 대목은 대충 다 암송할 지경에까지 몰두했습니다. 거의 ‘미친 책 읽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때 제가 본 무협지들이 바로 진정한 ‘그림책’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통 글자밖에 없었던 그 책들이 사실은, 제게 온갖 ‘그림’들을 그릴 수 있도록 해준 진짜 ‘그림책’들이었던 것입니다.

책에 ‘그림’은 없었지만 그 책들을 읽는 동안 천 가지 만 가지 그림이 제 머릿속에서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마음껏 그려질 수 있었으니 그렇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때 그려진 그림들 중 한 두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나도 여태껏 제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무유지』나 『군협지』를 읽을 때의 그림들입니다. 특히, 『무유지』의 ‘백의녀’(매강설)는 저의 ‘이상적인 여성 이미지’의 원판(原版)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에 대한 저의 ‘순정’은 그 이후로 수 많은 복사본들을 양산해 냅니다. 그리고 늘 그들을 패퇴시킵니다.

지금도 그녀는 당당하게 ‘원판’입니다. <비룡검객>의 주약란이 숱한 사내들의 심사를 흔들곤 한다고 합니다만 저의 매강설에비해서는 아무래도 한 수 아래라 하겠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조우한 동방불패(임청하)가 한 때 그녀의 입지를 조금 좁혀놓기는 했지만 절대적인 그녀의 위치에너지가 변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절대적으로 얼굴이 예쁘고 심성도 절대적으로 착했으며 절대적인 의협심을 가졌으며 절세의 무공을 익혔고 선악을 넘나드는 입체적인 삶을 살았으며 무엇보다도 첫사랑 방조남과의 순정을 끝까지 고수했습니다.

동방불패는 많이 비슷했지만 매강설의 모든 것을 다 재현해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백의녀 매강설, 그 이상의 여자는 없습니다. 『비룡』의 ‘주약란’도 꽤나 매력적이지만 ‘백의녀’에게는 역시 족탈불급(足脫不及), 복사본 중의 한 장일 뿐입니다. 주약란에게는 좌절과 자기 부정이 전무합니다.

타고난 계급이 너무 높고(그녀는 공주입니다) 너무 선하고 너무 반듯합니다. 젖먹이는 모성, 감싸는 부드러움의 이미지가 너무 승합니다.

‘백의녀’처럼 선악을 넘나들며 강약완급(强弱緩急)의 자유자재(自由自在), 용상봉무(龍翔鳳舞)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입체적 인물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당연히 독자들의 가슴을 태우는 ‘비련(悲戀’도 없습니다.

동방불패든 주약란이든 ‘백의녀’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뭇사내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판에 박힌 그림’에 불과합니다. 삼차원이 아닙니다. 그저 평면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백의녀와 주약란’, ‘백의녀와 동방불패’는 그런 의미에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를 보이는 관계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그림책’이 무엇이냐를 말씀드린다는 게 공연한 무협지 타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제목은 ‘그림책의 매력’입니다. 『그림책을 읽다』(진선희, 한우리문학)라는 책에서 그림책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지 한 번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아기여우와 털장갑』은 구로이 켄의 그림이 가진 포근하고 따스한 매력이 잘 느껴지는 그림동화이다. 니이미 난키치의 글이 전하는 메시지 또한 그림을 더욱 훈훈하고 부드럽게 만든다.

추운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새하얀 눈밭을 뛰어다니는 아기여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 내린 풍경을 본다.

아기여우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눈밭을 뛰노는 아기여우의 시린 손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엄마여우의 마음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모성애와 다르지 않다. 엄마여우는 아기여우에게 빨간 장갑을 사 주려고 마을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엄마여우는 마을로 내려가는 일에 두려움이 앞선다. 마을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끔찍한 기억 때문이다.

결국 엄마여우는 두려운 기억 때문에 아기여우와 함께 마을까지 가지 못한다. 그 대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경탄하고 있는 아기여우에게 마을 사람의 무서움을 단단히 일러 주고는 은전 두 닢을 손에 꼭 쥐어 장갑을 사 오도록 보낸다.

아기여우는 낯선 마을에 들어와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모자 가게를 찾아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불빛이 너무 눈부셔 당황하는 바람에 엄마여우가 그렇게 당부한 것을 잊고 그만 여우 손을 내밀어 장갑을 달라고 말하고 만다.

여우 손을 본 모자 가게 할아버지는 분명 여우가 돈 대신 낙엽을 내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낙엽이 아닌 은전을 받아든 모자 가게 할아버지는 어린이용 털장갑을 아기여우에게 쥐어 준다. 털장갑을 받아든 아기여우는 엄마여우가 말한 것과는 달리 사람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느 집 창가를 지나가면서 사람 엄마의 자장가 소리를 듣고는 엄마여우의 부드러운 자장가와 꼭 같다는 생각을 하며 엄마여우에게 달려간다.

그 시간 마음을 졸이며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여우는 힘차게 달려오는 아기여우를 보며 눈물이 날 만큼 기뻐한다.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그림 또한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해 가는 과정에 걸맞게 참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그림동화 전체를 뒤덮고 있는 눈은 차가운 느낌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하얀 눈에 비치는 색색의 햇살과 별빛과 불빛들도 모두 따사로운 이미지를 전한다. [진선희, 『그림책을 읽다』, 한우리문학, 2013, 140-141쪽]

‘그림’은 글자들이 다 전하지 못하는 ‘느낌’을 전합니다(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을 돕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따뜻하게 감싸는 그 어떤 것’을 ‘눈’이라는 ‘모든 것을 덮은 물체’를 그려서 대신 나타냅니다.

생명을 지닌 것들은 모두 그렇게(장갑이든 눈이든) ‘따듯하게 감싸져야 한다’는 것을 그림동화는 아이들에게 전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본 것이 적어 마음껏 자기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그럴 때 ‘그림책’을 보게 해서 교본(敎本)을 삼게 합니다.

그림은 ‘밖에 있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대로’ 그리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통해 세상을 하나씩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어떤 자리에서(강연 비슷한 자리) 어떻게 하면 묘사(描寫, 장면을 그려내기)를 잘 할 수 있는지 가르쳐 달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소설 공부를 하고 계신 분인 듯싶었습니다.

사실 저도 묘사에는 별 자신이 없는 터라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신춘문예에 목매던 시절 “처음 한두 장은 사진 찍듯이 그려내야 한다”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지내기도 했습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문장이 계시처럼 내려주기를 학수고대하기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젊은 시절 “묘사 없이도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다”(김윤식)라는 말을 다 들었겠습니까?

데뷔작도 「편지」라는 서사 위주의(지나간 이야기를 회고담으로 전해주는) 단편이었습니다.

저는 “내가 남보다 못하는 것을 애써 보충해서 인정받는 길보다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에 좀더 매진해서 인정받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묘사’를 배제했습니다. 묘사는 설명이나 서사가 담당할 수 없는 어떤 ‘환유적 작용’이 필요할 때 사용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냥 사진 찍듯이 그려낸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아기여우와 털장갑』에서 보여주는 ‘눈’에 대한 그림 묘사가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눈은 사랑을 환유합니다. 물론, 아이들용 그림동화가 아닌 곳에서, 그림이 아니라 말로, 그런 ‘번짐’을 포착해낸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이 노력으로 가능한 일인지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듯합니다. ‘사랑’을 알면 밖에서도 ‘사랑’이 보이고, ‘희생’을 알면 밖에서도 ‘희생’이 보입니다.

‘희망’을 알면 당연히 밖에서도 ‘희망’이 보입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의 눈부심’도 관계를 망가뜨리는 훼방꾼이 아니라 새 세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이정표가 됩니다.

『아기여우와 털장갑』이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습니다.

글: 양선규/소설가 대구교육대학교수
사진: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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