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臺灣)을 이해하는 방법, 세번째 짜요(加油)! 타이완

보얼예술특구를 지나는 경전철의 시간이 느긋한 공간의 멋

짜요(加油)! 타이완

하늘을 보던 시선이 바다로 향했을 때, 감동한 바다는 파도를 안고 사랑을 노래했다. 햇빛은 고왔고 습도도 그런대로 높지 않아 쾌적한 상태의 날이었다. 우울한 날(Glumy day)은 왠지 꺼림칙한 의식을 동반하는 것 같아 피해왔다. 그렇게 맑은 하늘과 얌전한 바다를 이해한 바람은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며 풍요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 같은 마음과 바다 같은 가슴이 만나 비단결 가득한 길을 낼 때 나오는 소리에는 어떤 톤의 화음이 깔릴까. 카오슝 풍경구 연자담(蓮慈潭)에서 용(龍)의 입으로 들어가 호랑이(犯)의 입으로 나왔을 때,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액운(厄運)은 또 얼마나 떼어냈을까?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1년간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收奪?)을 수혜(授惠)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나라의 하루는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등화관제 탓에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은 스산하다.
중국 관광객이 전혀 들어올 수 없는 닝샤나 야합 야시장(夜市場)은 파리만 날리고 청결하지 않은 상가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먹거리가 없다. 반론은 있을 터이나 적어도 나의 눈에 비친 대만의 야경은 침울하다.
1919년 일인이 지은 총독부 건물이 지금의 대만총통 관저다. 자료예 의하면 대만은, 2019년 총통 관저 설립 100주년 기념식에 현재 대만의 아름다운 건물을 설계했던 당시 일본제국주의 설계사의 손자를 초청해서 대대적인 환영식을 개최했다고 한다.
이유는 없다. 단지 이렇게 아름답고 예쁜 건물을 남겨주신 고마움에 대한 답례라 했다. 우리 같으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던 YS는 단칼에 경복궁의 중심을 짖누르고 있던 조선총독부의 대가리를 잘라 천안에 처박았다.

대만을 식민지화한 다섯 나라 중, 28년간의 네덜란드나 17년의 스페인은 이해해도, 일본보다 더 오래 지배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영향이 작다는 것은 아니러니다. 물론 한족이 대부분인 대만의 정서에 만주족인 청(淸)이 구겨넣을 공간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만큼 51년간 실질적으로 대만을 다스린 일본의 영향이 컸고 그 영향에 대만인의 특유의 기질인 순응이 작용했다는 반증이리라. 뭐랄까? 순도 높은 적응력의 힘이라고 할까? 아니면 맹목적인 굴종(?)이라할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정체성의 부재와 대만인의 순응 기질을 이해하면, 그저 아름다운 건물이기에 보존해야 한다는 논리도 충분히 설득력을 같는다.
그들의 상당수도 지배의 역사는 싫어하지만, 좋든 싫든 지배 당한 역사도 역사로 인정한다는 논리다. 솔직히 말하자면 찬란한 역사든, 고난의 역사든, 우리 선조와 내가 만든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명청 교체기에 건너와 원주민을 산촌으로 몰아내고 주인이 된 내성인(內城人)은, 중국에서 쫓겨온 주제에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한 외성인(外城人)을 혐오한다. 왜 아니겠는가? 잘 한 짓이라고는 앞서 기술했듯이, 자금성에서 [가치를 알 수 없는 금괴와 70만 점이 넘는 왕조의 유물을 가져온 것] 밖에 없는 족속들이니까?
결국 그네들의 기득권 싸움은 외성인인 국민당이 들어오고 힘들어진 내성인과 갈등이 첨예화한 사회적 난제인 것이므로 시간만이 해결해 줄 것이다.

타이페이의 야류 지질공원에 있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석과 카오슝 풍경구 연자담이 공묘(孔廟)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어찌될까? 비록 수백의 신들은 물론 일본의 신사(神寺)도 그대로 보죤하는 대만인들에게 공자의 존재가 절대적인 것은 아이러니지만 그래서 서로를 존중하는 민족성은 아련하게 남았다.
대륙의 나라 중국은 구채구, 황산, 장가계, 만리장성, 자금성, 샴그리라 등 넓은 땅허리를 받드는 공간이 거의 모두 예술이지만, 자연이 빚은 대만의 예술은 아무래도 “야류 지질공원의 신비”다. 타이페이의 101빌딩이나 카오슝의 높을 高자 카오슝(高雄)빌딩이 랜드마크는 아니다. 야류 지질공원의 “여왕석”은 말하자면 대만 관광의 거의 7할을 차지하고도 남는다.

거기에 산악인들의 로망이 곁들이면, 우리처렴 국토의 대부분이 산인 대만에 우리와는 달리 3,000m 이상의 고산(高山)이 269개나 있고, 가장 높은 산이 4,000 고지를 위협한다는 말에 솔깃하여, 등산을 위한 재방문의 기회를 포착할 수밖에 없다면, 당신은 산악 마니아거나 타이완의 매력에 흠뻑 젖은 감성의 집시가 되어 있는 것이 틀림 없다.

1948년 노벨상을 받은 미국계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 토마스 스턴스 엘리어트는, 1922년에 발표한 5부작 장시 제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썼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서 생명을 일궈내는 극진한 생동(生動)을, 죽음과 키스하는 욕정으로 의인화하여 역설적으로 표현한 싯귀다. 역설(易說)은 때로 진실의 우회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말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자연의 경외(驚猥)에 대한 헌사(獻辭)로 들린다. 이후에 다가오는 계절의 여왕 5월에 대한 은유치고는 너무나 고차원 방정식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5월을 [샹그리라(이상향)의 계절]이라 부르지만, 나는 잔인한 달 4월의 생동과 희생이 5월의 ‘도원춘경(桃花春京)’의 이상향을 만드는 원천이 아닐까 생각한다.
꼭꼭 잠궈뒀던 방문의 빗장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바람과 새떼들의 망명, 4월은 카오슝 [보얼(駁二) 예술특구]의 황량한 수탈 창고와 왜색풍 문화의 부자연스러움과 신선함의 어깨를 돌아 새로운 활성 도시 [타오중(台中)]의 춤사위 곁에 살포시 머문다.

다시 카오슝(高雄) 국제공항으로 돌아와 티웨이의 좌석을 더듬는 순간 거센 비가 내렸다. 상당히 오랜 기간의 가뭄에 비가 내릴 때까지 인디안 기우제(祈雨祭)를 카오슝 시장은 환호작약 했겠지만 이방인의 입장은 매우 다행이었다.
머무르는 동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기후는 맑거나 흐림으로 정직했으며 더위는 견딜만한 온천이었다. 온천의 나라 일본도 부러워한다는 온천은 숨쉬며 행복했고 바람은 적당히 제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그렇게 돌아온, 출입국 절차 치르다가 날이 새는(?) 세계최고의 허브공항 인천에서는, 춘풍의 바람에 실린 참혹하게 부드러운 달빛이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의 가운데에서 금문도와 타이완을 끌어 안는 중국의 시간이 다정하게 흐른다. 그 미소를 품에 안고 중국과 대한민국의 쳇바퀴 외교가 풀린다.

어제 내가 만든 시간이 내일 내가 가야할 길의 문을 여는 열쇠로 작용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하루에 무려 24시간을 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이 사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내가 만든 역사가 전체적으로 보면 빈약하지만, 내 개인적인 역사는 금액으로 매길 수 있는 유물이 아니라 소중하고 존귀한 가치다.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중산 선생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민족, 민생, 민주)는, 카오슝 외곽 싸즈먼안에 있는 아름다운 국립중산대학(國立中山大學)의 캠퍼스에만 존재한다. 영국영사관의 시선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공간은 그러나 신비롭고 빼어나다. 다시 젊어지고 싶은 대학의 전경이 아득하다.
타이페이의 랜드마크인 101빌딩 기네스북에 오른, 37초 속도의 엘리베이터 천정에 그려진 별자리에서는, 카시오페이아와 북극곰, 안드로메다 등의 별과 목동과 처녀, 사자자리가 서로를 마주보며 봄의 대삼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 대만의 심볼인 랜드마크의 승강기에 표현된 별의 이미지와 빌딩의 전면을 장식한 오뚜기 같은 둥근 조각상이, 신비로운 마음과 평화롭고 원만한 성품을 지닌 타이완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스런 이기가 배제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생각해 보면 타이완(臺灣)의 일상 얼굴은 바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산 높고 물 맑은 고을에 모여(山高水麗) 아침이 선명하고 맑은 자연(朝日鮮明)을 사랑하며 사는 우리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글 사진: 박철민/ 작가
여해레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