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이야기] 심양, 청태종의 묘 “소릉”

심양 홍타이지 청태종의 묘

2024년 6월 28일, 우리 국방동우회는 마지막 일정으로 심양 홍타이지 청태종능을 답사했다. 소릉(昭陵)이라 불리며, 서울 잠실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인조에게 항복을 받은 이다.
삼배구고두는 한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땅에 찢는 방식으로 세 번 절한다. 이제 조선은 청의 번국(蕃國, 중국에 조공한 나라)이 됨을 의미한다. 이는 구한말에 이르러 조선이 청의 속국이나 아니냐의 다툼으로 번지게 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진) 청 소릉 앞에서

소릉(昭陵)은 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궁궐처럼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었지만, 문화재 등급은 ‘AAAA’로 우리가 답사했던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과 비교하여 ‘A’가 하나 모자란다.

소릉은 인위적으로 만든 내(川)를 건너면 솔밭 사이로 커다란 궐 안에 분묘가 있다. 분묘꼭대기에는 큰 비술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비술나무는 경복궁 경내에도 4그루나 있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비술나무에 까마귀가 앉으면 복이 온다는 풍습도 있다고 하니, 고구려의 삼족오(三足烏)를 연상케 한다. 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다. 우연의 일치지만 한문을 해석하면 “신라를 사랑하여 깨우친다.”라는 뜻이 되니 이 또한 신기할 뿐이다.

사진) 봉분 위 비술나무

1780년 8월 1일(음력), 연암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넌지 37일 만에 북경 자금성 조양문에 이르러 21 왕조 3,000여 년 중국 흥망성쇠를 논한다.
“그가 조회하는 궁전을 정전(正殿)이라 하고, 그가 살고 있는 궁전을 태화전(太和殿)이라 하고, 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며, 종족은 여진족이다. 직위는 천자이고, 호칭은 황제이고, 직분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일이고, 자신을 짐(朕)이라 부르고, 남들은 폐하(陛下)라 부르고, 말은 조(詔)라 하고, 명령은 칙(勅)이라 한다.” (<열하일기> 관내정사)

그가 누구인가?
만주족을 통일한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 홍타이지며, 몽골과 조선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만주족이라 명명하고, 국호를 청(淸)이라 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1636년 12월, 홍타이지는 압록강을 건넌지 5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를 남한산성에 가둔다.
왜, 삼남(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있는 군사들, 북방에 있는 군사들은 인조를 구하려 후방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경기도 광주 쌍령(雙領)전투에서 몰살했기 때문이다. 40000 대 30*, 보병 4만 대 기병 30명의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몰살당하고 인조는 전의(戰意)를 상실한 채 남한산성에서 걸어나 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남한산성 내에서 벌어진 주화파 최명길과 척화파 김상현의 치열한 논리 다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왜 그런가?
그들이 논한 명분론과 실리론의 거대 담론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성안에 갇힌 왕과 신하, 비빈들, 그리고 1만 3천의 병사에게 날아든 군사 전황(戰況) 보고서 ‘명나라 구원병 불가, 삼한 구원병 몰살, 북방 구원병 무소식, 식량 바닥, 식수 바닥, 무기 바닥’이다.
이 상황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 주화파가 이겨서가 아니라 굶주려서 나왔다.

사진) 황제문양. 용발톱이 5개. 경복궁은 3개

나는 명분론과 실리론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식량을 어떻게 구하고, 식수는 어디서 구하고, 삼남 군대와 북쪽 군대와의 군사적 연계성은 어떻게 가지고, 청나라 군대의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글로 사가(史架)를 뒤덮었다면 후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되었는지 인과라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저절로 이가 빠진다. 이를 막은 것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그저 불소치약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40~50이면 죽었던 기대수명을 8~90세로 늘린 것이 거대 담론이 아니라 상하수도의 분리와 백신이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더욱더 명분론에 집착하여 이미 망한 명나라를 숭배하기 위해 숙종은 창덕궁 후궁에 대보단(大報壇)을 쌓고 명의 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제사를 지내고, 선비들은 송시열의 유훈에 따라 괴산 화양계곡에 만동묘(萬東廟)를 지어 조선 선비들은 충절을 잊지 않겠다고 또 제사를 지냈다.
만동묘는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말로 황하는 만 번을 굽이쳐도 결국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조선의 충절은 변치 않겠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허망한가?

“적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 (<손자병법> 모공 3-5)

조선이 강화도로 피신을 할 것을 미리 알고 쳐들어온 홍타이지와 청의 팔기군 기동성과 전략을 모르고 막은 인조와의 전쟁은 이미 청이 심양을 출발할 때 결정되었다.

*쌍령전투의 군사 규모는 논란이 많으면 아군 최대치 4만에서 최소치 2~3,000명이며, 청의 기마병 척후병 30명 본대 3,000명이라는 주장도 있음.

글 사진: 윤일원 작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