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사이트에 들어가면 검단산(黔丹山)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천변만화하는 사계가 그리운 산(각색)’ 봄(春)에는 초록이 싱그러운 자태로 유혹하고, 여름(夏)에는 계곡의 물살이 볼을 흔들며 유혹하고, 가을(秋)에는 산을 덮는 억새가 은빛으로 유혹하고, 겨울(冬)에는 눈꽃 사이를 걷는 낭만으로 유혹하는 산이라고 말이지요.
한성 백제 500년 도읍지 하만 위례성을 굳건히 지킨 검단산(黔丹山)은 백제의 영혼을 지킨 거룩하고 숭고한 제단이 있었던 산, 한성백제의 영을 모시던 제단이 있던 산이었던 겁니다. 초기 백제왕들은 이 성스러운 산에 올라 저 넓은 팔당호를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웠겠지요. 오늘도 검단산은 조용히 하남과 광주의 어제를 수렴하고 한성백제 시절의 영욕을 구어 내며 내일을 기리는 등산객들의 사연을 담담하게 듣고 앉아 있는 천생 거인(巨人)입니다.
잣나무와 전나무 숲이 피톤치드로 이끌다.
포털을 검색하니 살고 있는 곳에서 검단산까지 가장 빠른 대중교통 코스는 3호선~5호선~하남풍산역~2번 마을버스(약 2시간 40분소요)였어요. 개통한 지 이제 1년 됐다는 하남풍산역을 나와 그 넓은 사거리 아파트 단지에서 눈대중으로 살피니, 주공아파트 앞 정거장에서 2번 버스가 떠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또르르 달려가 기다리길 10여 분, ‘버스와 여자는 기다리지 마라. 또 온다.’던 이문열의 소설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였었던가? 기다리기 전에 도착한 마을버스는 하남시 전체를 돌고도 남게 돌아 30여 분 후, 검단산 초입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앞에 나를 패대기치고 갔어요. 남은 건 처음으로 하남시 전체를 구석구석 확인할 수 있었다는 보람이었지요.
아웃도어 상품점들이 밀집한 입구와 먹거리촌 몇 개를 지나면 드러나는 등산로 초입은 나무데크로 무장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산 전체를 계단으로 장식하는 여느 수도권의 산들을 연상하고 실망하려는 찰라, 등산로 초입에서 아직은 화사한 얼굴을 뽐내는 몇 그루 단풍들과 조화된 데크의 갈색 입술이 떨어진 낙엽과 몸을 섞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지요.
나무데크가 끝나고 흙길로 접어드는 등산로는 오솔길이었고 오솔길에 떨어진 낙엽이 불어주는 피톤치드에는 겨울의 햇살이 익어 계절의 순환을 경쾌하게 알려 줬고요. 호국사 갈림길을 지나면 나오는 오르막길에 펼쳐진 전나무 숲길의 향연에서는, 주위 잣나무 군락지의 태평소 소리를 타고 형의 칼날을 피해 고구려로 피신 가던 백제 부흥의 마지막 주역인 왕자 ‘풍’이 대성통곡(哭)을 하며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저절로 숙연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해야 했습니다.
전나무 숲길부터 흙과 돌길이 퓨전하며 리듬감으로 등산객의 발걸음을 조율하던 잘 포장된 등산로는, 군데군데 하나씩 지지대를 설치한 등산로와 폐쇄된 샘터 근처에 설치된 휴식장소를 배게 삼아 팔자 좋게 잠을 주무십니다. 이어 나타난 등산로는 순탄하게 등산하는 등산객들이 못마땅했는지 수질이 적합하여, ‘어여! 마시라. 그러면 그대는 장수할 것이다.’라고 유혹하는 ‘곱돌광산 약수터’의 샘물을 한 바가지 마시기 전에 겹겹이 쌓인 계단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마시려고 뜬 곱돌광산 약수터의 물바가지 안에서 새삼 하남시와 한성백제를 유전하던 누 천 년의 역사가 춤을 추더니, 미추홀 시대를 마감하고 한성백제로 투항하던 비류백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얼른 마시려던 물을 쏟고 물바가지 가득 새롭게 물을 받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의례를 지냈습니다.
이곳 곱돌광산 약수터 앞 조망도 나름 유명합니다. 맑은 날이면 멀리 북한산과 불암산이 한 눈에 들어오지요. 미세먼지로 뒤덮인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시계(視界)가 불안합니다. 서울의 조망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검단산을 설명하는 표지판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더군요.
‘검단산(해발 657m)은 하남시 동부에 위치한 산으로 정상에서 보면 동쪽으로는 두불머리로 합류하는 북한강과 남한강 및 팔당호, 서쪽으로는 하남 시내를 비롯한 춘공(?) 유적지와 이성산성, 남쪽으로는 남한산성과 객산, 북쪽으로는 운길산 예봉산과 두미강을 시원스레 조망하며 서울시내는 물론 멀리 북한산이 눈앞에 있다. 검단산은 백제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이라는데 학자들의 이견이 없다. 즉, 신성한 제단이 있는 큰 산인 검단산은 백제 고도의 진산(鎭山)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검단산은 곧 한성 백제인 위례성의 진산 즉 도읍지의 주산(主山)이라는 것이죠. 백제의 초기 팽창 시대를 연 웅지(雄志)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약수 한 바가지에 한 생각이 저물 무렵, 나무데크로 이뤄진 등산로를 바라보니 지금까지의 수월한 둘레길 같은 오르막길은 끝나고 비로소 가파른 깔딱 고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채 10분도 나무계단을 오르지 않아 나온 팔각정 쉼터(이곳이 원래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능을 조성하려던 터였던가?)에서는 아예 좌판을 벌여놓고 장사를 하는 것이 이곳이 포장마차인지? 야유회 장소인지? 도통 구분이 되질 않았습니다. 아마 등산로 초입 애니메이션 고교에서 현충탑 방면으로 올라오는 등산객이나 하산하는 인파들이 주로 머무는 포인트 정도로 인식되었습니다. 딱히 마뜩한 정경은 아닌듯하여 마침 사진촬영 포인트가 팔각정 앞에 마련되어 있어 단체 촬영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과 탁자를 놓고, 탁배기와 대화에 심취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 곧장 정상으로 향합니다.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방향으로 올라 정상에서 유길준 묘소 방향으로 내려가거나 반대로 오르거나 내려오는 등산로가 가장 일반적인 검단산의 코스라 별 이견 없이 취한 8~9km의 등반길, 편안한 흙길과 야자매트, 그리고 경사가 고른 나무 데크로 이루어진 등산로는 이 산이 왜 수도권 남부 시민들의 안식처인가? 하는 의문을 쉽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검단산 정상의 높이는 657m, 사실 수도권 남부의 산들 중 관악산보다 더 높은 산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게 자신의 왕좌를 내어줄까요? 여기부터 400m 정도가 진정한 오르막, 깔딱 고개지요. 돌아가는 길과 직선 길의 차이는 불과 50m, 잘 정비된 돌길로 경사가 급하게 이어진 직선 길을 택해 돌길과 나무계단을 오르다보니 시야가 탁 트이며 하늘이 ‘왜 이제 와? 나 안 보고 싶었어?’
헬기 하강장이 함께 하는 넓은 그라운드, 이곳이 바로 검단산 정상입니다. 감성의 그늘 탓이겠지요. 미세먼지를 뚫고 두물머리와 팔당호를 바라보는 눈가에 이슬 하나가 달려와 맺힙니다. 멀리 중미산과 유명산 명지산 화학산, 용문산과 백운봉이 손짓하고, 북쪽으로는 아차산과 이성산 관악산과 북한산이 롯데타워를 사이에 두고 유혹하는 정경은 ‘산이 거기에 있어 오르지만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가르쳐 줍니다.
올라온 방향과 반대편 산행길인 ‘아랫배알미’쪽으로 내려가면 강과 같이 걷는 나를 발견할 지도 모르지요. 잠시 정상 표지석에 서서 연인으로 보이는 일행의 사진을 찍어준 후 나도 기념사진을 부탁합니다. 넓은 정상 여기저기서 텐트를 쳐놓고 상행위를 하는 상인에게 사온 막걸리 통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습니다. 간신히 남은 의자에 몸을 의지하고 땀을 씻은 후 연 소박한 한 끼, 오늘 따라 참치김밥과 사과 한 입에 녹는 지평막걸리의 맛이 실로 예술입니다. 아마 ‘온조의 후예’들이 이 너른 공터 위에 마련했을 제단의 제사상이라고 이 훌륭한 오찬(午餐)보다 나았을까요? 나는 지금 무척이나 풋풋한 사람입니다.
하산하며 생각한 개화기의 조선, 산 중턱에 묻힌 유길준은 그때 어디에 있었던가?
무언가를 쓴다고 낑낑대다 보니 정상에서 평소보다 더 많이 쉬고 있는 나를 보았어요. 서둘러 일어나 시간을 보니 오후 3시가 되어가는 하산 길, 오래 전 등산 매니아였으나 관절이 나빠져 몇 년 전부터 산행을 멈춘 선배가 산 아래 주막에서 기다린다는 카톡을 받고 ‘와 이래 좋노.’ 배낭을 동여맵니다. 올라온 방향 바로 옆으로 유길준 묘소 곁을 지나 다시 올라온 곳으로 돌아가는 코스에 발을 딛고, 올라 올 때보다는 경사가 급진적 과격을 자랑하는 돌길을 내려갑니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아저씨,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젊거나 중년(?)인 여성 서너 분이 묻습니다.
“다 왔어요. 지금처럼 열심히 영차영차 힘들게 오르다보면 도착, 한 삼십 분이면 정상입니다.”
진짠데? 나는 힘들지 말라고 위로까지 해주며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내라고 말해 주었는데? 들려오는 소리로는,
“야, 야, 남자들 말 믿을 거 하나 없어. 남자들이 삼십 분이라면 두 시간이야, 두 시간. 올라오느라 턱 빠졌는데 시쳇말로 이제부터 녹초 되는 거야. 그만 돌아가자.”
이런 된장. 언제까지 이 나라는 진실이 거짓과 동거하며 날라리 블루스를 추고 있는 현실에 목말라야 하는 것인가? ‘진짜예요.’라고 소리칠까 하다가 그만두고 하산을 서둡니다. 기다리는 탁배기가 그립고 조선 최초의 국비 일본과 미국 유학생이었던 천재 유길준이 누워 있는 자리에서 역사를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당시 ‘서유견문’을 집필하며 개화기의 선각(先覺)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꼬리표처럼 붙은 친일 딱지는 일제가 준 작위를 거부하며 씻겼지만, 격동기의 천재가 자신을 믿어 준 조선에 다 하지 못한 대업에 대한 과오를 씻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랐을 터, 공(公)의 구중심처에 있던 망국의 그늘이 이제는 다스려졌길 바랍니다.
유길준 가족묘에서 생각에 잠겨 있을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선배의 재촉 전화가 귀청을 때릴 때쯤, 다시 야자로 만든 매트가 등산로를 감싸주는 하산 길에 청솔모 한 마리가 지나가며 눈을 흘깁니다. ‘나, 잘 못 한 거 없어. 아니, 먹을 것이 없어 못 줘서 미안해.’ 녀석은 도토리 한 톨도 쓸어가는 인간의 이기에 철심을 박으려하는가 봅니다. ‘까짓 대신 욕 맞아 주지요. 생명은 모두 소중하고 자연은 소중한 질서 위에서 언제나 숭고한 것이니까요.’
도로가 시작되려는 길 입구에 월남참전기념탑이 있어 목례합니다. ‘우리는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웠노라.’ 월남전의 명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든 숭고한 희생에는 부정적인 언사는 불편한 것이지요. 선대의 희생이 있어 지금의 이 나라가 있는 겁니다. 때로는 이 나라의 백성인 것이 지치고 고달프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백성인 탓에 나는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령들에게 명복을 빌고 돌아서는 자리에, 30여 년 전 광고대행사 시절 광고기획자(AE)로 명성을 날리던 선배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고 서 있습니다. 몇 년 만에 반가운 얼굴, 등산로 초입에 있다는 전집을 찾지 못할까봐 펌프에 붓는 마중물처럼 콸콸 웃자라는 정情이 호흡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산들머리 휴게소! 부추전 탁배기 한 사발에 생의 질곡이 녹아 검단산으로 올라가는 풍경을 보면서도, 차마 보아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차라리 사치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