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신문=장범석 기자) 지난 1월 설 연휴 마지막 날, 프로당구연맹이 주관하는 3쿠션 PBA 7차 투어에서 무명의 김병호가 우승했다. 작년 6월 시작된 PBA 투어는 매번 우승자가 바뀌기는 했어도 존재감 ‘제로’에 가까웠던 김병호의 우승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본인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그는 어떤 대회에서도 우승을 하거나 입상조차 한 경력이 없었다. 작년 PBA투어가 출범하며 단 한 차례 32강 토너먼트에 오른 것이 그동안 47세 김병호가 이룬 최고 성적이었다.
김병호가 생애 처음으로 세계대회 4강에 올랐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세계최강이라 할 쿠드롱이었기 때문이다. 쿠드롱, 그가 누구인가. 1990년대부터 30번 이상 세계대회를 석권하고 있는 3쿠션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4대 천왕’이라는 수식어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 ‘완전체’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쿠드롱은 기존의 세계대회와 승부호흡이 다른 PBA의 세트제 방식에도 적응을 끝내고 4차 투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 마디로 김병호와는 급이 다른 선수였다.
그러나 김병호는 주눅이 들지 않았다. 경기 시작과 동시 뱅크샷(‘가라쿠’) 3개를 포함해 한 큐에 8점을 몰아치며 기선을 제압했다. 그리고 쿠드롱이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15-5로 첫 세트를 따냈다. 2,3세트를 나눠 갖은 후 맞은 4세트. 궁지에 몰린 쿠르동이 맛세이(불어messe’, 찍어치기)등 화려한 기술을 동원해 11-5로 점수 차를 벌렸다.
그러나 김병호의 추격이 매서웠다. 4이닝에서 4점을 따라잡은 후, 5이닝에서 상대가 뱅크샷을 미스하자 곧바로 6득점해 게임을 끝내버렸다. 세트 스코어 3:1, 애버리지 1.656대 1.226. 김병호의 완벽한 승리였다. 경기가 끝나자 쿠르동은 김병호를 덥석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줬다. 패배를 인정하고 승리를 축하한다는 의미였다.
이어 밤 10시에 벌어진 결승전의 상대는 스페인의 마르티네스. PBA 1회 때부터 참가해 5차 대회 우승을 통해 실력을 입증한 바 있는 젊은 강호다. 김병호와 대조되는 훤칠한 신체, 조각으로 빚은 듯 무표정한 얼굴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결승전은 7전 4선승제, 3:3 타이가 되면 마지막 7세트는 11점으로 승부를 가린다.
1세트를 20분 만에 15-7로 끝낸 김병호는 2,3세트를 내주고, 4,5세트를 잡아 3:2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6세트에 들어가자 상황이 급변했다. 마르티네스가 첫 큐에 10점을 몰아친 것이다. 그때까지 파이팅 넘치던 김병호가 갑자기 무기력해졌다. 당구가 멘탈 스포츠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병호는 5이닝 동안 단 1점을 얻는데 그치고 말았다. 영패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야 할 정도로 안타까운 이닝이었다.
운명의 마지막 7세트. 김병호의 초구가 아슬아슬하게 2목적구를 벗어났다. 기세를 탄 마르티네스가 뱅크샷 등을 성공시키며 가볍게 4점을 획득했다. 2이닝은 두 선수 모두 공타를 기록한 가운데 3이닝에서 마르티네스가 3점을 추가해 1점에 그친 김병호를 7-1로 몰아 붙였다. 승부의 추가 마르티네스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상대가 비교적 쉬운 샷을 놓친 후 김병호에게 돌아온,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4이닝. 까다로운 포지션이 4쿠션으로 풀리면서 김병호의 눈빛이 살아났다. 오랜 내공이 깃든 그의 스트로크가 춤을 추더니 점수는 순식간에 타이가 되었다. 이후 침착하게 3점을 추가한 김병호는 마지막 1점을 남기고 생수로 목을 축인 후 숨을 골랐다.
그리고 밀어치기 회전이 들어간 회심의 수구를, 쿠션과 2적구 사이 작은 틈새로 정확히 꽂아 넣었다. 11-7. 결승전 하이런을 기록하며 승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3시간을 넘긴 PBA 최고의 역전 드라마였다. 이 모습을 덤덤하게 지켜보던 마르티네스는 뜨거운 박수와 함께 두 손으로 하트모양을 만들어 김병호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동안 관중석에서 ‘아빠 사랑해’라는 손 플래카드를 내걸고 울먹이며 응원하던 딸은 마지막 공이 들어가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김병호의 닉네임인 ‘보미아빠’의 바로 그 보미다. 그녀도 여류 3쿠션 선수다. 당구클럽을 운영하던 아빠의 권유로 중학교 때부터 큐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전국대회에서 수차례 우승을 경험했고, LPBA 투어에서도 4강에 두 차례 오른 유망주다.
김병호의 인터뷰도 화제가 되었다. 우승 소감을 묻자, 먼저 주최 측에 감사한다고 하더니 손바닥에 적어온 임원들의 이름을 떠듬거리며 한 명씩 읽어 내려갔다. 여기저기 웃음이 터졌다. 인터뷰 마지막에 그는 진한 대구 사투리로 “아직은 김병호선수보다는 보미아빠가 더 좋다”며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 딸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의 클럽을 정리하고 상경해 다른 클럽의 매니저로 전전하던 그였다.
2019년 2월 출범한 PBA와 LPBA는 독창적 기획으로 한국형 프로당구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서바이벌 예선, 세트제 본선, 뱅크샷 2점, 후구제 폐지 등 새로운 규칙들이 흥행요소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파격적 우승상금과 함께 서바이벌 2라운드부터 지급되는 단계별 상금도 선수들의 실력향상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터이다. 2월 28일부터 시작되는 19~20 시즌 파이널에서는 또 어떤 스토리의 주인공이 탄생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