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臺灣)’을 이해하는 방법, 두번째 타이페이(台北)

분주한 타이페이의 일상 속에서

타이완을 이해하는 방법, 수도 타이페이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공자(孔子)는 말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자신에게서 구하는 군자와 타인에게서 구하는 소인배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형언한 공자의 시간을 읽은 안연(安緣)은 빙그레 웃었던가?

1895년 청일전쟁 패배의 결과로 일본이 대만을 영구 조차하기로 요구했을 때, 무기력한 청나라 정부가 후일 제국주의 일본으로 인해 국토와 인민의 생명이 비참하게 유린된 전초기지가 대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부끄러운 역사 속에는 분명 부패한 정치와 우매한 민족의 어리석음이 흐른다.

일본과 대만의 관계는 영구조차의 형식으로 1895년 강제 지배한 이후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51년에 이른다. 일본은 대륙 침략의 전초 기지를 차근차근 다져나갔고, 그 인프라의 힘은 해방 이후 8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섬나라의 일상을 만든다.

연자당 풍경구

아침부터 잠이 들기 전까지 일본풍을 벗지 못하는(?), 아니 벗지 않는, 대만 내성인의 숨결에서 차이니스 타이페이보다는 한결 온순한 재패니스 타이페이의 현실을 본다.
그것은 관광지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 舊 영국영사관 터에서, 카오슝 제1의 관광지이자 진흙을 마시고 자라 천지에 광명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의 미학 연지담(蓮池潭) 호숫가에서, ‘이랏샤이 마센’ ‘아리가또’과 ‘스밈마센’을 외치는 알바생들의 목소리에 고스란히 남아, 일본의 영향을 남 부럽지 않게 과시하는 그들의 현주소를 실감한다.

사실을 말하면 제국주의의 침탈에 당한 민족이 끊임없이 사죄를 요구하거나, 아픔의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에 점수를 줄 수는 없다. 대만인들은 51년 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1876년 강화도 불평등조약부터 70년이 가까운 시간, 현실의 우리에게 아직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역사는 상대적인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우리에게는 독립의 표상이자 민족의 선각자이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의미로 생각하면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의 의거도 다르지 않다.

연자당 풍경구의 쌍탑

다시 생각해 보자. 만약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개화(開化)를 하고 제국주의의 선봉이 되었다면, 일본과 우리의 주종관계는 바뀌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명청 교체기에 혼란을 피해 원주민을 무시하고 대만국의 주인이 된 내성인(內城人)의 입장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대륙 참략을 단행하여 남경 대학살 등의 피비린내 나고 역겨운 일본을 용서할 수 없는 외성인(外城人)의 입장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이나 반역 대신 평화를 꿈꾸고 그 평화의 방법은 순응과 절제, 그리고 ‘괜찮아요’다. 귀찮게 하지만 않으면 괜찮고 간섭하지만 않으면 “뭐 어때?” 인 거다. 그래서 그들은 내성인의 입장과 통일을 부정하는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지지하고 차이잉윈이라는 여성 총리를 내세웠지만, 일본을 그리워하는 보수 국민당 계열의 견제도 잊지 않아 대만의 중심 수도 타이페이의 시장(市長)은 장개석의 손자다.

우리는 가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에 있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를 기억한다. 죽음을 이해하므로 운명을 사랑하며(Amor fati) 현재에 충실해야 하는 것(Carpe diem), 당연하게도 그러하니 너의 현재를 가치있게 쓰라는 뜻이다. 이 세 가지 모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처세훈이자 삶의 태도(Attitude)가 된다.

TTX를 기다리며

한국의 KTX를 능가한다(?)는 대만의 고속철도인 TTX가, 카오슝(高雄) 지우윙역(左營驛)을 출발하여 1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타이페이(台北)에는 잠시 스잔한 빗줄기가 슬쩍 머리를 스치더니,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 드는 바람개비를 돌렸다.
그 바람은 흐린 날의 대기를 지나 야류지질공원(野硫地質公園:Yahliu geopark)의 신묘(神妙)한 풍경구를 낳고 맹인 연주자의 톱 연주의 감동을 낳았으며, 클레오파트라를 닮은 여왕바위의 눈썹 안에서 포효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의 칼끝은, 일국일체제(一國一體制)로 위협하는 중국에 대항하여 통일을 거부하는 대만판 MZ세대의 합리적이고 이유 있는 정부에 대한 항명과, 요랜 독재에 염증을 느낀 대만인의 염세를 자극하여 정부를 거부하는 대신, 정체성을 상실하는 새로운 세대의 이중성을 낳았다.

그들에게 있어 국부인 장개석이 잘한 일은 도망나올 때 챙겨온 자금성의 금괴와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70만 점의 궁중 유물 뿐이다. 국가 부(富)의 규모가 세계 6위인 대만이 그 많은 금괴와 유물을 모두 공개했을 때 대만은, 잃어버린 국가의 정체성을 되찾고 국제 사회의 미아(謎兒)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 다가올는지도 모른다. 메멘토 모리는 현재 살아 있는 대만인들의 자화상이다.

통일에 대한 기대보다는 미국이든, 일본이든, 네덜란드든, 중국을 제외한 어느 열강의 식민지도 불사하는 것이 요즘 대만 내성인과 젊은이들의 바램이다. 아침은 하루를 여는 문이기도 하지만 어제를 위로하는 기억의 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대만의 아침은 여전히 잿빛이다.

속이 좁고 완고한 생고집의 인물인 장개석이 210만의 군인과 군속을 몰고 대만으로 쫓겨온 역사적 사실이 대만 사람들에게 행운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작금의 대만인(내성인 객가인 원주민)이나 젊음들의 시각은 다분히 냉소적이다. 금문도 사건을 위시하여 시진핑으로부터 끊임없이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는 대만의 입장에서 선택의 길은, 오랜 식민화 시대에서 얻은 협력과 방관에 있는 듯하다.
1949년 700만 대만에 210만 장개석 일행의 도래로 외성인(外城人)이 주류가 되어 대만의 독재를 형성한 이후, 대만의 정치가 훼손한 민족의 졍기는 급기야 오늘날 차라리 재식민지 시대의 도래를 꿈꾸는 기득권과 젊음의 국가 정체성의 상실을 낳았다.

70만점의 보물로 가득한 대만국립박물관

미국이든, 일본이든, 서구 어떤 나라든, 원수로 변한 한족(漢族) 동포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흡수 통일만 아니면 괜찮다는, 오늘날 상당수 대만인의 사고 방식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은 듯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정부가 밉고 허가 낸 도둑놈이라고 할지라도 그 정부를 만든 ‘국가(Nation)은 내가 나라는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1895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 무려 51년 간 식민지 통치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아픈 기억을 대만인들이라고 모르는 건 절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랬지. 그랬구나!” 하는 그들 특유의 인정 또는 체념 의식의 발로가 평화의 섬 대만의 오늘을 만든 것 뿐이다. 하여 그들은 1919년 일인이 총독부, 즉 지금의 대만총통 관저까지, 2019년 이렇게나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주신 고마움에 당시 총통부 설계자의 손자까지 초청, 호들갑(?)을 떨며 대대적인 행사를 연 것이다.
물론 우리라먼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거나 경을 칠 일이다. 일본의 아름다운 건물 보존이나 고마움에 대한 기억이라니, 죽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들으면 다시 살아날 일이고, 대부분 사람들이 종주먹을 먹일 일이다.그렇다. 1945년 이후 엾었고 앞으로도 나름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의 외교 정책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영원히 자유로운 수 없는 우리는 불행하다. 사건은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난다. 다만 그것을 기억하거나 인식하는 인간의 회로가 항상 보편적인 문제가 될 뿐이다.
이 문제를 대만의 그것에 비교하자면 이렇다. 즉 그들도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잊지는 않지만, 조차가 끝나고 중국본토로 귀속된 홍콩의 예를 들어볼 때 통일은 대단히 불필요한 언어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나라를 찾기보다는 여행기나 동영상을 통해 느끼기만 한 나에게 외국이라는 개념보다 이웃이라는 합리적인 의식으로 쉽게 다가온 여로(旅路)를 개척해 준 선배의 배려에 감사함은 물론이다. 그 감사의 깃발 아래 지질공원의 왕비와 공주가 인사를 하고 508m 101빌딩이 으쓱 어깨를 벌렸다.
실리와 현실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대만인의 삶의 태도를 존중한다. 그러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리 반가운 얼굴이 아니다. 특히 국가의 정체성을 찾지 않고 국제 사회의 미아로 대만을 방치(?)하는 정치권의 구태(舊態)는 대한민국 정치의 무뇌함을 뛰어 넘는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두뇌들이 모여 있고 미국이나 일본이 통째로 사고 싶은 신도시 뉴타이페이 시티의 실리콘벨리가 아무리 성성해도 국가라는 방어막이 튼튼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퇴색해 진다. 하물며 상당수의 국민이 식민지화도 불사할 정도로 정체성을 상실한 사회에서의 국제 경쟁력은 무의미하다.
화려함 따위를 거부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실리의 대만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사이에 빛이 바래는 우중충한 도시의 외관과 운명의 흐름에 스스로를 방어하기보다는 순응의 편안함에 기대는 그들의 모습도 경계한다.

오늘도 늙은 타이페이와 카오슝은 뉴타이페이 시티나 젊어지는 타이중(台中)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시들어 간다. 그 시듦은 흡사 수도 서울, 그것도 강남만 화려하고 다른 곳은 방치(?)의 수순을 밟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밤을 도와 카오슝으로 돌아오는 TTX의 질주를 느끼며, 통제적인 등화관제로 어두운 나라 대만의 여유로운 시간과 안타까운 현실을 조망한다. 일개 필부필부가 생각하는 그릇에 얼마만큼의 공간이 담길 줄은 모른다.
다만 흔히 언론에서 얘기하는 먹거리의 나라라는 의식은 상당히 과장됐다는 사실과 함몰된 정치력이 국민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와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언제까지 과거 마오쩌뚱의 진입을 막아줬던 미국의 항공모함과 비행 편대가 날아다니지는 않을 거라는 진실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막고 있어도 절대로 본토에 대한 공격은 불가하듯이, 시진핑이 대만에 포를 쏘아도 대만은 본토를 공략할 수 없고 국제 사회는 비난은 할지언정 수수방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빈약한 나라의 현실은 냉혹하다. 우리는 무심코 대만을 오가지만 국제 사회의 미아인 대만의 현실은 처참하다. 국제 경쟁력이나 땅값의 상승도 국제사회의 고립 앞에는 무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제적으로 인증된 대학의 현주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만의 고립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지대하다. 왜냐하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문제임에도 받아들이는 당사자는 너무 느긋하기 때문이다.
중국만 아니라면 식민지라도 좋다는 오늘날 상당수 대만인들의 사고는 정치에 염증을 낸 우리의 젊음과 다르지 않다. 타이페이를 떠나 타이중 타이난(台南)을 거쳐 카오슝(高雄) 좌영역으로 돌아오는 TTX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시선으로 어두운 도시의 잃어버린 활력이 손을 내민다.
핏기 잃은 손길은 무심하다. 아무리 외피보다는 내면을 중시하고 또 50cc 오토바이의 기능처럼 효율이 지배하는 나라라 해도 어두운 도시의 밤거리는 스산하고 음습하다. 그 도시의 기능이 쇠락한 야시장에 앉아 외식 사업가 백종원이 자랑하던 후추고기화덕만두를 먹다가 입맛에 맞지 않아 슬며시 버릴 곳을 찾는다.
하루는 아침의 활력으로 시작하지만 하루의 고마움을 느끼는 주체는 나다. 하루야 정말 고맙다. 그 고마움을 느끼는 우리의 의식 또한 고맙다. 맑다가 흐리고 비오다가 미세먼지로 툴툴해지는 날씨의 변동폭이 심술궂지만 대만의 하루에도 적지 않은 고마움을 던진다. 다 괜찮다.

글 사진: 박철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