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이야기] 광개토대왕을 만나러 가는 길

한국 인천국제공항에서 1시간 55분 비행하면 중화인민공화국 선양 타오셴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그 보다 한발 앞서 외교부에서 환영 인사 겸 주의가 날아드니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다.

“[Web발신] <외교부> 2023.7.1.부로 중국의 반간첩법이 강화 시행된바, 우리와의 제도‧개념 등 차이로 예상치 못한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 유의 바람”

2024년 6월 25일 06:00 인천국제공항, 우리식 이름 6‧25전쟁, 중국식 이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 발발한 지 74년이 되던 날, 우리 국방부 퇴직자 모임인 국방동우회 24명은 고구려 유적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을 답사한 후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보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A조 8명, B조 8명, C조 8명, 이렇게 각각 선두 대장과 후미 대장을 정하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앞뒤가 누구인지를 식별한 후 줄을 서기 시작한다. 6‧25전쟁 74주년을 맞이한 인천국제공항 기념 퍼레이드가 아니다. 이 행열은 중국으로 출국하기 위한 단체 비자(VISA)의 오와 열이다.

1780년 7월 10일(음력), 또 한 사내가 압록강을 도강한 지 보름 만에 요양을 거쳐 선양에 이르러 그 날 첫 소회를 남긴다.

“아하!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수없이 싸웠던 전쟁터로구나. 옛말에 ‘범이 달리고 용이 날아오른 것 같은 영웅이어서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는 말처럼 천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천하가 편안한가 위태로운가는 항상 요동 들판에 달려 있었다.” (<열하일기> 성경잡지)

왜 그런가?

선양(沈阳)은 심양(瀋陽), 성경(盛京), 봉천(奉天)으로 불리는 도시다. 도시에 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얽히고설킨 역사가 많다는 뜻이다.

컴퓨터를 켜고 구글 지도를 보라. 지도의 레이어를 행정단위가 아닌 지형으로 설정한 후 이 지역을 보면 랴오둥반도-선양-장춘-하얼빈을 경계로 거대한 산악지대가 일망무제 광대한 평원과 대충돌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평원을 지배한 종족과 산악을 지배한 종족의 거대한 경계점, 그 경계점의 전략적 요충지, 산악을 벗어나 외롭게 건설된 도시, 중국 본토 군대가 요동 벌판을 지나 혼하(渾河) 강을 건너야 들어올 수 있는 요새가 바로 심양이다.

“심양은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일갈이다. 그러하다. 이곳을 들어온 우리 민족(韓民族)이 이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이 또한 우리 민족이 아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 고구려 영토라 고구려가 중원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이곳에서 군마를 가다듬고 천 리 일망무제, 대문도 없고 마당도 없는 곳으로 출격해야 하는 전초기지다.

이곳에서 국방동우회는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이 있었던 집안(集安)으로 향한다. 왜 지명을 ‘집안’으로 했는지 나는 그 어원을 모른다.

그저 순수 우리말 ‘집 안의 편안함’, 집안이 생각날 뿐이다. 마치 이두식으로 이름을 지은 일본 아스카(飛鳥, 날 비 새 조의 이두식 표현, 날(日)이 새(出)는 고을, 해가 뜨는 고을)로 백제인이 최초로 건립한 고대 국가가 연상될 뿐이다.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의 강역이 만주벌판에서 일본 아스카까지 그 강역을 꿈꾸었던 그때 그 시절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부국강병의 글을 쓴다고 말하지 못 하리라.

우리를 태운 리무진 고속버스는 거대한 옥수수밭 사이 낮은 구릉지대를 말(馬)이 밀려들 듯이 달린다. 높은 산이 보이질 않는다. 우리가 사는 부여에서 강경 가는 길이나, 경주에서 영천 가는 길에 만나는 산이며 들판이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이 길의 사진을 포토샵으로 좌우 위아래 마우스로 확대하여 원본을 잡아 늘인 형국이다.

이 길은 나라가 만들어지는 공장이다.

요동 벌판 끝자락 심양(瀋陽)에서 압록강 중류 집안(集安)으로 가는 길 한 가운데에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가 태어난 곳 영릉진(永陵鎭)이 있다. 그는 1598년 이곳에 조부와 부친의 묘를 쓰면서 나라 세울 결심을 한다. 1598년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연도라 역사는 모순과 역설의 씨줄과 날줄이 뒤섞인 시공임에 틀림이 없다.

그도 그 옛날 부여에서 탈출한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설립했던 환인현(현재 桓仁縣으로 추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최초의 수도 영릉진에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을 건설한다.

오호라, 그렇구나. 1616년 누르하치가 자신의 말(言語)이 통하는 5개 부족을 통일하고 자신의 종족이 최초로 세운 금나라를 이었다고 후금(後金)으로 정하면서, 자신의 조상 금나라를 멸한 칭기즈칸의 후예 몽골을 팔기군으로 최초로 편입한다.

무릇, 작은 나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첫 단계가 포용이라는 사실을 그도 단번에 알았다.

팔기군은 군사행정 조직이다. 평시에는 행정 조직이지만 전시에는 군대 편제가 된다. 이는 독일 통일과정의 작은 공국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만든 국민 29명당 1명의 군국화 조직과 다름없다.

이제 항미원조, 미국을 대항하여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외친 중국은 1단계의 국가에서 벗어나 중간단계의 국가에 이르렀다. 싸구려 중국산은 옛말이라 할 만큼 첨단 제품이 쏟아진다.

그런 중국의 동북부 지역이 온통 옥수수밭이라니, 옥수수는 임진왜란 때 들어온 작물이 아니던가? 이 옥수수가 없었던 그 옛날 누르하치 시절, 고구려 시절 백성들은 무엇을 먹고살았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논’이 있고 ‘구들’이 있고 ‘돌’로 만든 성이 있다면 위대한 정복자 광개토대왕의 말발굽이 지나간 자리임에 틀림이 없다.

“최고의 권력자는 아랫사람이 그가 있는 것만 겨우 안다(太上下知有之).” (<노자> 제17장)

나는 그가 억센 힘만이 아닌 부드러운 통치를 하였기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태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여긴다.

*내일은 제2부 ‘광개토대왕릉의 거친 기댄 돌(長大石)’로 이어집니다.

글 사진:윤일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