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이야기] 38살에 죽은 이 사내, 광개토대왕

옛 고구려의 변방 요동 심양(瀋陽)에서 4시간 동안 달려오니 저 멀리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는 가운데 제법 너른 분지를 형성하니 이곳이 바로 고구려가 424년 동안 수도로 보낸 국내성(國內城)이다.

우리를 태운 리무진은 시내를 벗어나 산기슭으로 향한다. 저 멀리에 ‘好太王碑(호태왕비)’라는 황금색 글씨가 큼지막하게 보인다.
“오호라, 내 여태껏 전쟁기념관 한 귀퉁이에서 모형으로만 봤던 진품을 여기서 보게 되는구나.”
가쁜 호흡만큼이나 발걸음도 빨라진다. 중국이 자랑하는 방탄용 비각(碑閣) 안에 대충 다듬은 듯한 거대한 검은빛 비석이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가두어도 가둘 수는 없노라.” 하는 듯 검은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린다.

인간의 척도가 있다. 자신의 키 높이라면 친밀감이 들지만, 자신의 키보다 너무 높으면 아예 무시한다. 비석으로 가장 경외감을 주는 높이, 고개를 뒤로 활짝 젖어도 다 읽을 수 없는 높이, 바로 광개토대왕릉비다.
“총글자 수 1,775자, 그중 140여 자 자연 마모나 인위적 파손으로 추정”
어마어마한 내용들, “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요서(遼西, 요동강 서쪽) 지역인 시라무렌강 유역 패려(稗麗)를 공략하였으며, 러시아 극동 연해주 일대의 숙신(肅愼)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신라를 침입한 왜를 격파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냈고, 백제성을 공략하기 위해 아리수(阿利水, 지금의 한강)를 건넜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역사에 미스터리가 없다면 이 또한 역사가 아니다.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라이위신민)”으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ㅇㅇ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언빌리버블!

서기 391년 신묘년 한반도 상황, 일본에서는 환호할 내용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절할 내용이다. □에 ChatGPT AI를 사용하여 무수히 많은 글자를 대입해봐도 대략의 그 뜻은 달라지지 않는다.
첫 □에 들어갈 단어로는 “海” (바다), “江” (강), “兵” (군대), “軍” (군사)이며, 두 번째 □□□ 에 들어갈 단어가 “國” (국), “城” (성), “地” (땅), “邑” (읍), “攻” (공격), “侵” (침략), “征” (정벌), “制”(제압)이다.

역설에 역설이다. 비문이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은 청이 자신의 나라 발원지라 여겨 “봉금(封禁)”으로 묶어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조선에서도 여진족 금나라 유물이라 여겨 방치했고, 일본이 만주 진출을 앞두고 청일전쟁(1894~1895)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이 비문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자 세간의 관심이 폭발하게 된다.

“왜, 중국이 광개토대왕릉을 이토록 방치하지?”
우리 일행 중 한 분의 질문이다. 딱히 누구에게 질문을 던졌다기보다는 첫인상이 주는 느낌이 그렇다. 무엇이라도 있으면 크기에 콤플렉스가 있는 중국이 거대한 성을 쌓듯 복구할 텐데, 여전히 돌무더기로만 존재한 데 대한 자존심 상한 목소리다.

너른 터에 왕릉을 호위하는 무인석은 찾아 볼 수도 없고 개망초만 무성한 가운데 다 무너진 돌무지가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지금이라면 강가에 쓰다만 자갈 몇 트럭을 싣고 와 잘 다듬은 돌 몇 개를 얹혀 놓으면 하룻밤 사이에 뚝딱 만들 수 있는 수준이다.

왕릉을 만든 공력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릉이라니? 나의 의심을 달래줄 하나의 유물이 있다면 영국 스톤헨지의 거대한 돌을 가져다 능에 기댄 거대한 자연석, “너희들 나를 깔보지 마, 이놈들이 내 호위무사야”하는 외침뿐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이 주는 거대한 힘, 이것이 광개토대왕릉의 본질이다.

“저기가 북한입니다”
우리 일행을 여기로 안내 한 가이드가 능의 정상에 올라 한 말이다. 중국과 북한을 가르는 기준은 단 하나 산이다. 산이 민둥산으로 무너져 내려있으면 북한, 산이 짙푸르러 기름져 보이면 중국, 이러한 경계는 한강 자유로를 타고 임진강으로 들어서면 늘 바라보는 풍경과 같다.
차별적 극명한 대비, 중국과 북한은 똑같은 정치체제지만 ‘자본주의’만은 달리 수용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유’라는 ‘민주주의’다. 부국강병의 첫 시작이 인간을 그물같이 옥죄는 ‘생각의 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우리가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섰다가 하지 말며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더 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이러한 극명한 대비도 없어야 한다.
“전쟁의 정세는 신속함이니, 적이 아직 이르지 않은 틈을 타고, 적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길로 나오며, 적이 아직 경계하지 못한 곳으로 공격한다(兵之情主速 乘人之不及 由不虞之道 攻其所不戒也).” (<손자병법> 구지 11-2)

 

그렇다. 38살에 죽은 이 사내. 재위 22년 동안 해마다 정복 전쟁을 한 이 사내의 후손 고구려가 만주벌판에서 물러난 이후 고려의 윤관장군이 동북 9성을 쌓아 백두산 넘어 700리까지 뻗친 이래로 우리 민족은 다시 이 땅을 밟지 못했다.

*내일은 제3부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으로 이어집니다.

글 사진: 윤일원 작가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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