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위를 걷는 섬 — 역사와 현재를 품은 지중해의 요새
지중해 한가운데,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남쪽으로 불과 90km.
몰타(Malta)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낀, 면적 316㎢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다. 하지만 이 땅 위에 새겨진 문명의 궤적은 놀라울 만큼 밀도 높고, 깊다. 고대 신전과 십자군 요새, 제국의 잔재, 그리고 현대 유럽의 감각까지—몰타는 지중해라는 고대의 시간에 접속하는 입구다.
석기시대의 시간, 돌에 새겨진 우주
몰타는 기원전 5,000년 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가르 킴(Ħaġar Qim), 므나이드라(Mnajdra), 타르시엔(Tarxien) 등 선사시대 신전 유적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석조 건축물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고고학계의 신비로 남아 있다. 이들 신전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니라, 태양의 이동을 따라 설계된 복잡한 천문학적 구조를 지닌다.
이 작은 섬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우주의 질서’를 읽던 문명의 거점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십자군 기사단, 요새가 된 섬
몰타의 중세는 곧 ‘성 요한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의 시대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는 이 섬을 기사단에 하사했고, 기사단은 이곳을 전략적 방어 거점으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565년, 몰타 대공성전(Siege of Malta)이 벌어진다. 오스만 제국 3만 대군이 침공한 가운데, 불과 수천 명의 기사단과 몰타 민병대는 한 달 넘게 이 섬을 사수해냈다. 이 전쟁은 유럽 기독교 문명의 승리로 기록되었고, 이후 몰타 전역은 바위 위에 요새를 쌓아 올린 섬이 된다.
기사단이 계획한 도시 발레타(Valletta)는 중세 도시 설계의 정수다. 좁고 직선적인 골목들, 고풍스러운 발코니, 그리고 성곽을 따라 펼쳐지는 석조 건물들. 모든 것이 전쟁과 방어, 그리고 신에 대한 경배로 지어진 공간이다. 오늘날에도 발레타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국의 전초 기지에서, 전쟁의 기억까지
몰타는 이후 나폴레옹을 거쳐, 19세기부터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된다.
그들은 몰타를 해군 기지이자 제국의 남쪽 경계로 활용했다. 그리고 20세기, 몰타는 다시 한 번 세계사 중심으로 소환된다.
제2차 세계대전
몰타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보급 요충지로, 연합군과 추축군 사이의 지중해 해상 교통로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군은 이 작은 섬에 집요한 공습을 퍼부었고, 1940~42년 사이 약 3,000회의 폭격이 쏟아졌다. 특히 발레타는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다시피 했고, 시민들은 지하 묘지와 요새 지하공간에 피난처를 만들었다.
이 극한의 저항에 감동한 조지 6세는 ‘조지 십자훈장’을 몰타 국민 전체에 수여했다.
몰타 국기의 좌측 상단에 박힌 은색 십자가는, 지금도 그 훈장을 상징한다.
영어와 와인, 관광과 블록체인 — 몰타의 오늘
오늘날 몰타는 EU 소속 국가로, 공용 통화는 유로(EUR), 공식 언어는 몰타어와 영어다.
행정, 교육, 금융, 관광 등은 거의 영어로 운영되며, 몰타는 ‘유럽 속 영어국가’라는 특이한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문에 몰타는 한국을 비롯한 비영어권 국가들에게 인기 있는 어학연수 목적지로 부상했고, 특히 청년층에게는 ‘짧은 유럽생활+어학+휴양’이 가능한 실속형 연수지로 알려져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인 방문객도 꾸준히 늘며, 일부 시즌에는 발레타 거리에서 한국어 안내를 듣는 일도 흔하다.
또한 몰타는 유럽 내에서도 ‘가상자산 친화국’으로 손꼽힌다.
2017~18년 가상화폐 열풍 당시, 몰타는 세계 최초로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에 대한 포괄적 입법을 시행했고, 다수의 글로벌 거래소가 본사를 몰타로 이전했다.
이로 인해 ‘블록체인 아일랜드’라는 별명이 붙었고, 소규모이지만 혁신 허브로서의 기능을 실험하고 있다.
몰타는 지금도 요새다
몰타의 전체 인구는 약 55만 명, 도시화율은 95% 이상이다. 하지만 면적이 작고 인프라가 한정된 탓에, 연간 3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여름철엔 오버투어리즘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운다.
주거비 상승, 쓰레기 문제, 원주민 커뮤니티 붕괴 우려까지—몰타는 이제 ‘지켜야 할 세계유산’이자, ‘지속 가능성 시험대’ 위에 서 있다.
바람과 햇살의 나라
기후는 연중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다.
여름(69월)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122월)은 비가 내리지만 영상 기온을 유지한다.
최적의 여행 시기는 45월, 1011월.
하늘은 맑고, 바람은 부드러우며, 이 계절의 몰타는 시간 여행자가 되기에 가장 적절하다.
마지막으로, 이 섬이 주는 질문
몰타는 크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시간은 방대하고, 이야기는 풍부하다.
그 무엇보다도 이 섬은 ‘어디에 속하지 않으면서, 모두의 경계에 존재하는 곳’이다.
유럽도, 아랍도, 기독교도, 이슬람도, 전쟁도, 평화도 이곳에 머물렀다.
몰타는 늘 그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시간과 문명 사이의 요새로 존재한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발행인
Photo by Jungcha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