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셸에 첫 발을 딛다 –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그 순간

트래블가이드 칼럼 시리즈 1편

너머로 보이는 초록빛 산등성이와 붉은 지붕의 마을, 그리고 그 너머의 인도양은 어느 한 시점의 현실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활주로 대신 풍경 속으로 착륙한 기분. 세이셸의 첫 인상은 조용하고 묵직했다.

세이셸 국제공항.
이 섬나라의 관문은 생각보다 훨씬 소박했다. 자동문도 없고, 대형 광고판도 없었다. 철제 캐노피 아래 이어진 복도를 따라 도착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자체로 느릿했다. 출입국 심사대에는 오래된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 바람조차도 이 나라의 속도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입국 심사는 짧았지만 인상적이었다. 여권을 건네받은 직원은 아무런 질문 없이 여행자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고, 조용히 도장을 찍었다. 표정은 친절했고, 말보다는 시선이 먼저였다.
이곳은 서류보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였다.

공항 바깥의 공기는 달랐다. 이국적이라기보단, 무던하고 솔직한 공기.
햇살은 선명했고, 공기 중에는 바다와 흙, 그리고 초록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마헤섬 중심부로 향하는 도로는 한산했고, 길가에는 고층 건물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걷는 사람들, 나무 아래 커피를 마시는 노인, 담벼락에 기대어 신문을 읽는 중년의 모습이 거리의 일상처럼 놓여 있었다.

세이셸에는 도시가 있다. 그러나 그 도시 안에는 자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도시가 있다.

마헤섬, 삶과 자연이 서로를 존중하는 곳
세이셸의 주섬인 마헤(Mahé)는 인구의 90%가 거주하는 중심지이며, 수도 빅토리아(Victoria)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수도’라는 단어에서 기대되는 혼잡함이나 속도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빅토리아 중심 시장(Market Street)에 들어서면, 삶의 리듬이 낮고 부드럽게 흐른다.
가판대에 진열된 열대 과일과 향신료, 생선, 수공예품들 사이로 여행자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빛과 손짓으로 이어지는 대화, 기다림이 기본이 되는 거래 방식.
이곳은 ‘사람이 먼저이고, 말이 그다음’이라는 감각을 다시 알려주는 곳이었다.

자연과 생명이 말을 거는 식물원
도심을 벗어나 세이셸 국립 식물원에 들어서면, 열대의 숨결이 느껴진다.
코코드메르 야자와 수백 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이곳은 단순한 녹지 공간이 아니라, 섬 전체의 생태를 응축한 자연 박물관이다.
특히 그 안쪽 울타리, 알다브라 자이언트 거북(Aldabra Giant Tortoise)이 머무는 구역에 들어서면,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흐른다.

무게 250kg, 수명 150년.
이 거북은 갈라파고스보다 오래된 계보를 지닌 생명체로, 인간의 삶보다 오래된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존재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모습엔 영혼 같은 침착함이 담겨 있고, 반쯤 감긴 눈은 이 땅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묻는다.
세이셸은 느린 나라가 아니라, 시간이 쌓여 있는 나라다.
그 느림은 낙후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예의였다.

모랑 블랑, 그 위에서 내려다본 세이셸

마헤섬 중심부에는 세이셸에서 가장 높은 산, 모랑 블랑(Morne Blanc, 해발 905m)이 우뚝 솟아 있다.
열대우림 트레일은 시작부터 다르다. 붉은 흙, 이끼 낀 나무뿌리, 촘촘한 이파리들이 하늘을 가리며, 마치 식물들이 여행자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
30~40분쯤 오르면, 갑자기 모든 것이 터진다.

절벽 위 전망대에 서면, 마헤섬 전체가 아래 펼쳐진다.
산과 바다, 마을과 도로, 그리고 사람들의 삶.
도시보다 자연이 먼저이고, 그 위에 삶이 얹혀 있다는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인간이 자연을 잠식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의 삶을 감싸 안고 있는 곳이다.

럼과 맥주, 지역의 자부심
마헤 남쪽에는 타카마카 럼 증류소(Takamaka Rum Distillery)가 있다.
현지 사탕수수로 만든 럼은 세이셸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방문자는 럼을 시음하고 구매할 수 있으며, 증류소 근처 카페에서는 그 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럼은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라, 자연을 숙성시킨 결과물처럼 느껴졌다.

근처에는 세이셸의 대표 맥주인 세이브루(Seybrew) 공장도 있다.
작은 섬이지만, 이곳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것들이 있고, 그 안에는 ‘섬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낯선 이름, 그러나 잊히지 않는 풍경

‘세이셸’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낯설다.
과거 10년 가까이 관광청 사무소가 있었고, 최근 2년 전부터 데스티네이션 마케팅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브랜드 인지도는 높지 않다.
롱홀(Long-haul) 목적지, 높은 여행 경비, 거리감.
하지만 그 멀고 아득한 섬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그 기억을 손쉽게 내려 놓을 수 없다.

세이셸은 외치는 섬이 아니다.
대신, 조용히 기다리는 섬이다.
자연은 말을 하지 않지만, 모든 감각으로 환영을 전한다.

여기서 처음 발을 디딘 곳은 활주로가 아니라, 삶과 자연의 느린 경계선이었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발행인

[다음 예고] 세이셸 여행칼럼 2편 – 세이셸의 하루: 섬을 걷고, 파도를 느끼고, 사람을 만나다
자전거로 섬을 한 바퀴 돌고, 파도 소리에 기대어 낮잠을 자고, 이름 모를 해변에서 로컬 맥주 한 캔을 마시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