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가이드 칼럼 시리즈 2편
마헤섬을 떠나는 아침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가 진동을 남기며 천천히 떠올랐다.
창 아래 펼쳐지는 인도양은 유리처럼 평평했고, 섬들은 바다 위의 점처럼 흩어져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20여 분 뒤, 세이셸의 두 번째 섬, 프랄린(Praslin)에 도착한다.
작은 활주로, 간결한 공항, 그 곁에 파도 소리가 깃든 풍경.
이곳은 누군가의 고향처럼 조용하고 단정했다.
여행자의 일상이 아닌, 삶의 리듬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세이셸의 심장, 코코드메르의 숲
프랄린의 중심에는 발레드메르 국립공원(Vallée de Mai)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세이셸의 심장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오직 이곳에서만 자라는 코코드메르(Coco de Mer) 때문이다.
코코드메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자수다.
높이 30m, 잎의 길이는 6m를 넘고, 열매는 사람의 몸을 연상케 하는 형태로 무게는 20~30kg에 이른다.
고대 유럽에서는 이 열매를 ‘에덴의 과일’, ‘신의 나무 열매’라 불렀고, 수 세기 동안 정체불명의 전설로 바다를 떠돌았다.
이 신비로운 종은 오직 프랄린과 퀴리외즈 두 섬에서만 자생한다.
하나의 열매가 자라 완전히 성숙하기까지 7~10년, 그 씨앗이 싹을 틔워 잎을 펼치기까지는 인간의 한 세대가 흐른다.
이 숲은 빠름이 없다.
대신 지구의 원초적 시간감각을 품고 있다.
빛은 잎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명이 스쳐간다.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허락받은 존재로 이 숲에 발을 들이게 된다.
앙세 라지오 – 빛과 바람의 해변
프랄린의 북쪽 끝, 짧은 트레일을 지나면 세계 10대 해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앙세 라지오(Anse Lazio)가 펼쳐진다.
투명한 바다, 부드러운 백사장, 분홍빛 화강암 바위, 그리고 정적.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절경이다.
물이 무겁게 반짝이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시간조차 눕는다.
관광객도 적다. 그래서 더 깊다.
이곳은 ‘어디를 갈까’보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섬 마을 사람들, 낮은 생활의 리듬
섬 안쪽 마을은 작고 낮다.
가게 대신 나무 아래 그늘, 메뉴판 대신 입소문, 쇼핑보다 기다림이 있는 장소들.
시장에서는 얼음 없이 생선이 진열돼 있고, 바나나, 코코넛 주스, 수공예품이 길가 돌 위에 놓여 있다.
현지인은 여행자에게 말을 걸기보다 먼저 눈빛을 보낸다.
이곳에서는 거래보다 인정, 속도보다 존재가 먼저다.
앙세 게오르게뜨 – 가장 조용한 절경
프랄린 북서쪽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는 앙세 게오르게뜨(Anse Georgette)는 순백의 곡선 백사장과 바위 절벽, 그리고 짙은 바다 색이 조화를 이룬다.
이 풍경은 설명보다 감각이 오래 남는다.
카메라보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일이 더 진하다.
섬 하나에서 보낸 하루는, 감각이 잠시 멈춘 풍경이었다
프랄린에서 배를 타고 15~40분 거리에는 지도에도 희미하게 찍힌 섬 하나가 곧 호텔인 곳들이 있다.
노스 아일랜드, 프리깃 아일랜드, 실루엣 섬, 그리고 프랄린 근처의 힐튼 라브리즈 리조트가 있는 라브리즈섬까지.
이들은 단지 숙박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를 줄여주는 공간이다.
노스 아일랜드는 거북이들이 산란하는 하얀 해변과 석양을 등지고 흐르듯 지는 바다의 기울기가 인상적인 섬이다. 거대한 야자수와 은빛 파도가 맞닿는 그곳에서는 소리보다 정적이 먼저 와 닿는다.
프리깃 아일랜드는 정글처럼 울창한 숲과 그 안에 감춰진 풀빌라들이 조용히 숨어 있다.
테라스 아래로는 열대새가 날아들고, 밤이 되면 나무와 별 사이에서 새벽이 먼저 온다.
힐튼 라브리즈 리조트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단순한 편안함 속에 자연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곳이다.
풀장과 바다가 분리되지 않고, 사람은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앉아 있게 된다.
이곳에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무엇을 할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잠들고, 걷고, 듣고, 바람 속에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 모든 순간이 ‘여행’이라는 단어를 벗어난다.
떠날 땐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섬이란, 풍경이 아니라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이 가장 또렷해지는 순간은, 아무 말 없이 섬이 말을 걸어올 때다.
라디그를 향하는 오후
오후가 되면 여행은 다시 바다 위로 이동한다.
작은 페리가 프랄린 항을 떠나, 다음 목적지 라디그(La Digue)를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바다는 짙푸르고 잔잔하다.
멀리 실루엣으로 나타나는 라디그섬은 화강암 능선과 야자수가 어우러진 조용한 풍경.
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오래 기다려왔던 듯한 표정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발행인
[다음 예고] 3편 – 라디그, 세상 가장 느린 낙원의 마지막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