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 감성 칼럼 ② — 고조섬, 섬의 그림자 위를 걷다

몰타 본섬에서 페리를 타고 북서쪽으로 25분쯤. 물살이 잔잔한 날이었다. 배는 소리 없이 바다를 가르며 고조섬(Gozo)으로 향했다. 이 섬은 몰타의 또 다른 얼굴이다. 본섬이 도시와 유산, 사람들로 가득한 무대라면, 고조는 여백과 침묵, 그리고 느린 감정이 스며 있는 캔버스에 가깝다.

고조의 항구 마르사포른(Marsalforn)에 닿았을 때, 공기는 달랐다. 더 느리고, 더 단단하며, 더 오래된 냄새가 났다. 이곳에는 대형 호텔 대신 가정집 같은 게스트하우스가 많았고, 2층 발코니마다 빨래가 펄럭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소곳했고, 골목의 소리는 줄었고, 햇살은 반사되지 않고 스며들었다.

내가 처음 찾은 곳은 ‘지간티야 신전(Ggantija Temples)’이었다. 기원전 3600년경, 인류가 돌을 세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절.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신전 중 하나다. 이름부터가 ‘거인의 탑’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높이 5~6미터, 무게 20톤이 넘는 석재들이 정교하게 세워져 있다. 한때 사람들은 이 구조물을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라 믿었다.

신전 앞에 섰을 때, 나는 말을 잃었다. 그 돌들은 설명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손바닥으로 벽을 짚었다. 차가운 돌의 온도는 햇살과 공기의 시간차를 품고 있었다. 그건 오래전 사람들이 남긴 온도였고, 이 섬이 품은 기억의 껍질이었다.

신전에서 나와 고조의 중심 도시인 빅토리아(Victoria)로 향했다. 지역 사람들은 아직도 이곳을 라바트(Rabat)라 부른다. 고조섬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도시로, 언덕 위에 세워진 빅토리아 성채(Cittadella)는 이 섬의 심장이다.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바람이 불어왔다. 아주 오래된 바람. 농지와 붉은 기와지붕이 펼쳐지는 풍경, 종탑 너머로 들려오는 느린 종소리. 이 성벽은 과거에 섬 주민들이 해적과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대비해 몸을 숨기던 곳이었다.

나는 성채 안쪽 작은 골목에 있는 카페에서 쉬었다. 고조산 올리브오일과 신선한 치즈가 든 샐러드를 시켰다. 관광지는 적당히 붐볐고, 한국인 관광객도 간간이 보였다. 하지만 몰타 본섬과는 전혀 다른 리듬이었다. 여기선 모든 게 0.8배속으로 흘렀다. 핸드폰 속 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그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고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라마라 베이(Ramla Bay)’에서 만났다. 붉은 빛을 띠는 모래 해변이 펼쳐진 라말라 베이는 고조의 자랑이자, 몰타 전체에서 가장 특이한 색의 해변으로 꼽힌다. 해질녘,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바다는 진한 자청색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안선 가까이엔 연인 두 쌍과 아이 둘이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갔다.

차갑고, 부드러우며, 익숙하지 않은 감촉. 마치 오래전 어떤 감정이 되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고조섬의 해안선은 직선이 아니었다. 이 섬은 기억처럼 휘어져 있었고, 내 마음도 따라 휘어졌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탈 미에나(Ta’ Mena)’ 와이너리였다. 넓은 농장과 와인 셀러, 시음 공간까지 갖춘 가족 운영 농장이었다. 그곳에서 고조산 와인 한 잔을 마셨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흙냄새와 바람, 그리고 바위의 여운이 섞여 있었다. 와이너리 주인은 “우리는 시간을 병에 담는 사람들이죠”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는 그 말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와인을 천천히 삼켰다.

돌아오는 페리 위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고조섬을 바라봤다. 빛은 이제 거의 다 사라졌고, 섬은 윤곽만 남아 잿빛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섬이 밤이라는 시간의 물속에 천천히 잠겨드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몰타를 이야기할 때, 고조를 자주 빼놓는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고조는 몰타가 끝내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Gozo is what Malta once was — a poem in stone, spoken slowly under the sun.”

고조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섬이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발행인 

Photo by Jungcha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