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곤 한다. 고조섬에서 돌아온 날 밤, 나는 숙소 창가에 앉아 몰타 지도를 다시 펼쳤다. 익숙한 지명들 사이에 낯선 단어들이 있었다. Mdina, Blue Grotto, The Three Cities, 그리고 공항 근처 작은 와이너리 이름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이 섬의 절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몰타의 중심부,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엠디나(Mdina). ‘침묵의 도시(Silent City)’라는 별명이 있는 이곳은 한때 몰타의 수도였다. 오늘날에도 차량의 도심 진입은 제한되어 있으며, 골목엔 말 발자국 소리와 바람 소리만 울린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는 이곳은 마치 시간의 틈새 같다. 중세풍 저택들 사이로 붉은 노을이 스며드는 순간, 도시 전체가 한 권의 책처럼 펼쳐진다. 마치 누군가 읽다 덮어둔 오래된 이야기의 중간 페이지.
몰타 남서쪽 해안에는 블루 그로토(Blue Grotto)가 있다. 햇살이 수직으로 떨어질 때, 동굴 안 바위와 바닷물이 만들어내는 빛의 푸른 조화는 초현실적이다. 작고 낡은 나무 배를 타고 진입하는 동굴 속은 마치 바다 속 성소 같았다. 어쩌면 몰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랑이 그곳에 있었다. 관광객들이 탄성을 지르던 순간에도 나는 조용히 손을 담가보았다. 그 파랑은 찬물처럼 투명했고, 모든 것이 사라질 것처럼 순수했다.
발레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삼시티즈(The Three Cities)’는 몰타 기사단의 첫 정착지였다. 빅토리오사(Vittoriosa), 센글레아(Senglea), 코스피쿠아(Cospicua). 이 도시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낡은 요새, 작은 교회, 허름한 항구 창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살아 있는 역사’가 있다. 특히 빅토리오사에서는 기사단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인퀴지션 궁과 병원터, 그리고 좁은 돌길 위 어스름한 오후 햇살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공항 활주로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와이너리. 처음 몰타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창밖으로 보았던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한때 폭격의 표적이던 활주로 주변 땅이 지금은 포도밭이 되었다는 사실. 그 와인은 분명히 그 땅의 시간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끝내 그 와이너리에 가지 못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몰타의 아이러니였다. 상처 위에 꽃이 피고, 전쟁 위에 향이 자라고, 기억 위에 와인이 담긴다.
몰타에는 ‘코미노(Comino)’라는 아주 작은 섬도 있다. 겨우 몇 가구만이 사는 이곳은 블루라군(Blue Lagoon)으로 유명하다. 투명한 옥빛 바다와 하얀 바위,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카페 하나. 배가 닿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느려지고, 걷기 시작하면 더는 돌아갈 필요가 없어지는 곳이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그 섬에 하루쯤 멈춰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시간을 바라보는 하루.
몰타는 작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무한하다. 다 본 줄 알았던 도시의 골목에도,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 길목에도, 새로운 감정이 숨어 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이 섬을 ‘끝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덮는다’고 말한다. 언제든 다시 펼칠 수 있는 이야기책처럼.
“You don’t finish Malta. You leave it open, like a book with a bookmark.”
몰타는 그렇게, 다 읽히지 않는 섬이다. 남겨둔 기억이 많을수록, 다시 돌아올 이유가 더 선명해지는 그런 섬이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발행인
Photo by Jungcha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