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를 출발한 지 세 시간쯤 흘렀을까. 땅빛이 점점 붉어진다. 고요했던 초원이 갈라지며 계곡의 입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람의 손보다 바람과 시간이 먼저 지나간 흔적들. 거대한 붉은 절벽은 말없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이어진 길은 협곡의 입 속으로 이어진다. 카자흐스탄의 차른 캐니언이다.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이곳이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걸 느꼈다. 붉은 바위는 누군가의 얼굴 같기도 하고, 껍질처럼 벗겨진 세월의 단면 같기도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수록 햇살의 각도가 바뀌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협곡은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았다. 흙이 사락사락 무너지는 소리, 돌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리는 까마귀 울음.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지층은 마치 오래된 책장 같았다. 어느 한 줄기 벼랑은 깊은 주름을 가진 노인의 얼굴을 닮았고, 둥그런 바위는 아이가 쥔 점토 덩이처럼 순진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무게만큼은 분명히 느꼈다. 그건 역사의 무게도, 자연의 장엄함도 아닌, 그냥 바람이 깎고 지나간 풍화의 감정 같은 것이었다.
협곡 아래까지 내려가자 길이 좁아졌다. 벽은 더 가까워졌고, 하늘은 사각형처럼 작아졌다.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니, 붉은 절벽 틈으로 햇살 한 줄기가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한 줄기 빛이 나를 협곡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이곳을 ‘카자흐스탄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어쩐지 이곳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여기는 ‘누군가가 다녀간 자리’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데도 계속 있는 곳’이다. 자연이 스스로를 조각해낸 풍경.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있어온,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고요한 증언.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협곡의 바위들처럼 입을 다물고, 그저 침묵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용해졌다. 여행은 종종 ‘어디를 보았는가’보다 ‘어떻게 머물렀는가’로 기억된다. 이 협곡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행레저신문 l 이만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