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 고조섬 붉은 신화 ② – 붉은 해변, 라믈라에서 보낸 오후

바다는 조용했고,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다. 고조섬 북동쪽, 붉은 모래로 유명한 라믈라 해변(Ramla Bay)은 지중해 한복판에서 가장 따뜻한 색감을 품은 해변이다. 백사장이 아니라 붉사장. 부드러운 곡선으로 펼쳐진 해안선 위로 붉은 모래가 깔리고, 잔잔한 파도가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 해변은 단지 색만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바람이 아주 다정하게 분다. 파도는 몰타의 섬들 중 유난히 조용하다. 사람도 많지 않다. 나무 그늘도 없고, 장식도 없는 이 해변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풍부하다. 무엇 하나 인위적인 것이 없기에, 여기서는 걷고, 앉고, 바라보는 일조차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나는 라믈라 해변 입구에서 작은 언덕을 천천히 내려왔다. 한 손엔 고조산 와인이 담긴 병이 있었고, 다른 손엔 비스킷 봉지 하나.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펼쳤다. 문장은 천천히 읽혀졌고, 단어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았다. 이곳에서는 시간도 문장처럼 또박또박 흘러가는 듯했다.

멀리 보이는 탈 미스타 동굴(Tal-Mixta Cave)에서 내려다보았던 라믈라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동굴 입구의 어둠을 액자 삼아 바다를 바라보면, 해변과 바다와 하늘이 수평으로 겹쳐진다. 그 한가운데 내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해변에는 사람 몇이 조용히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모래 위에 조그만 성채를 쌓고 있었다. 아이들은 없었지만, 어른들이 모래 위에 앉아 모래를 손에 쥐었다 놓는 모습을 보며 나도 따라해 보았다. 따뜻하면서도 거친 붉은 입자들이 손바닥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것이 이 해변의 온도라고 생각했다.

한 무리의 여행객이 지나가며, 이곳이 호메로스가 말한 ‘오디세우스의 섬’이라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 풍경은 신화가 머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고, 나 역시 그 신화의 일부가 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하고,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책을 덮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와인은 햇볕과 흙의 맛이 났고, 바람은 이따금 책장을 넘기며 나의 게으름을 도왔다. 어디로도 떠나고 싶지 않았고,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있고 싶었다.

고조의 오후는 늘 그렇게 느리게 간다. 시계도 달력도 어울리지 않는 이 해변에서, 나는 작은 와인 한 잔과 붉은 모래를 기억의 가장 안쪽에 갈무리했다. 사람들은 때로 신화를 보러 여행을 간다. 하지만 라믈라에서는 신화가 사람이 된다.

그날, 나는 라믈라 해변에서 시간을 잃었다. 아니, 시간을 되찾았다. 바다가 숨을 고르고, 붉은 모래가 말없이 누워 있는 이곳에서. 나는 고조섬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기자

Photo by Jungcha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