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펼쳤다. 종이 위의 땅은 조용하고 평평했다. 그러나 그곳에 이름을 얹는 순간, 풍경은 언어를 얻고, 낯선 대륙은 내 안에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카자흐스탄’이라는 여섯 글자가 어느 순간 가슴에 걸렸다. 그리운 것도 아니고, 막연한 동경도 아닌데, 자꾸만 눈이 머문다. 바람의 나라, 초원의 그림자, 불그스름한 협곡.
여행은 늘 거기 없던 문을 여는 일이다. 일상이라는 실내에서 한 걸음만 바깥으로 나가면,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온도가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난다. 우리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는 잊고 있던 질문을, 낯선 공간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게 되묻곤 한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카자흐스탄은 그 물음에 다소 느린 목소리로 대답하는 나라다. ‘금방 재미있어지는’ 곳이 아니다. 한 도시를 다 돌고 나서도 손에 들어오는 인상은 적다. 대신 가슴에 머무는 감각은 묵직하다. 협곡의 단면보다, 협곡을 마주했을 때의 정적이 더 오래 남는다. 호수의 물빛보다, 그 앞에서 아무 말 없이 함께 선 누군가의 기척이 더 또렷하다.
카인디 호수엔 나무가 물속에 서 있고, 콜사이 호수의 물빛은 하늘보다 진하다. 침블락의 만년설은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압도한다. 차른 캐니언은 땅이 울리는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 알틴에멜 국립공원의 사막은 노래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경관은 사진으로 보면 반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나머지 반은 그 자리에 있을 때, 바람을 맞고, 흙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늘과 햇살의 경계를 천천히 걷고 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다.
사람보다 자연이 더 많은 나라. 도시보다 하늘이 더 가까운 나라. 이 나라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조용히 있을 뿐이다. 대신 보는 이가 먼저 마음을 기울이면, 땅이 살며시 반응한다. 그래서일까. 카자흐스탄에서 느끼는 감동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여행이 있다. 떠나기 전보다 돌아와서 더 깊어지는 여정. 카자흐스탄은 아마 그런 나라다. 지금 당장 가지 않아도 괜찮다. 이 글을 읽은 어느 날, 당신의 마음이 먼저 그곳에 닿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진짜 발을 디뎠을 때, 이미 익숙한 바람이 당신을 맞이하길.
그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올 것이다.
여행레저신문 l 이만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