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가이드 칼럼 시리즈 3편
페리는 프랄린을 떠나 천천히 라디그를 향해 나아갔다.
바다는 잔잔했고, 구름은 낮았으며, 섬의 윤곽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채로 조금씩 다가왔다.
멀리 보이는 회색 바위 능선과 야자수, 그 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해변.
라디그(La Digue).
세이셸에서 가장 작고, 가장 느리고, 가장 오래 기억되는 섬이다.
도착은 입장이 아니라 슬며시 스며 드는 것이다.
도착장을 빠져나오면 관광버스도, 자동차도 없다.
낯선 도시의 소음이 아니라, 자전거 벨소리와 고양이 울음소리가 여행자를 맞는다.
작은 섬은 자전거로 반나절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지만, 누구도 속도를 내지 않는다.
길은 모래로 덮여 있고,
야자수가 내린 그늘 아래로 사람보다 바람이 먼저 지나간다.
섬은 관광지를 소개하지 않는다.
그저 ‘어디든 가보라’고 조용히 등을 밀어줄 뿐이다.
거북과의 시간, 거울을 마주한 듯
섬 중심부로 들어서면 알다브라 자이언트 거북 보호구역이 있다.
몇 백 년을 살아온 거대한 거북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꺼내기도 전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들의 움직임은 걷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이다.
풀을 먹는 모습조차 의식처럼 느껴지고,
그들이 깜빡이는 눈동자 하나에 시간의 밀도가 달라진다.
거북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깨닫는다.
이 섬에선 느림은 결핍이 아니라 깊이라는 것을.
세 개의 해변, 세 개의 감정
안세 수르스 다르장(Anse Source d’Argent)
분홍빛 화강암과 얕은 투명 바다가 겹쳐진 풍경.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히는 곳이지만, 정작 이곳을 걷는 이들에겐 카메라보다 침묵이 먼저다.
바다는 잔잔하고, 그 잔잔함은 마음까지 끌어내린다.
걷다 보면 해변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랑 안세(Grand Anse)
섬의 남쪽, 바다의 기운이 강하게 몰려드는 곳.
파도는 높고, 모래는 흐르고, 바람은 울며 지나간다.
이 해변에선 누구도 웃지 않는다.
경외와 감탄, 그리고 잠시 멈춤.
이곳은 자연이 여전히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연의 경계선이다.
쁘띠 안세(Petite Anse)
그랑 안세를 지나 걷다 보면 나타나는 작고 고요한 해변.
이름 그대로 ‘작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
사람의 말보다 바다의 호흡이 더 크게 들리고,
혼자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해변.
그 자체로 자기만의 시간을 복원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늘과 낮잠, 여행의 또 다른 목적지
한낮의 라디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현지 식당에서는 구운 생선에 라임을 짜 넣고,
바나나와 향신료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가 조용히 놓인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 않는다.
대화는 길지 않고, 식후에 반드시 찾아오는 건 졸음이다.
그늘 아래 나무 의자에 몸을 눕히면,
사람은 배경이 되고, 배경은 사람을 감싸 안는다.
라디그에서는 풍경이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감각의 이불이 된다.
해 질 무렵, 가장 조용한 장면
오후 늦게, 해변에 다시 나가면
라디그는 또 하나의 빛을 준비하고 있다.
석양.
이 섬의 하루는 해가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태양이 스스로를 내려놓는 의식이 시작된다.
분홍 빛 하늘, 금빛 물결, 그리고 해안을 감싸는 긴 그림자.
그 안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한 장면 속에 각자의 기억과 감정이 고요히 눌러앉는다.
이 석양은 빛이 아니라 침묵의 색깔이었다.
돌아오는 길, 마음은 뒤에 남는다
다시 프랄린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으면
모두가 조용해진다.
그 섬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머물렀는지가 중요하다.
라디그는 풍경을 보여주는 섬이 아니었다.
시간을 풀어놓는 섬,
감정을 천천히 정리할 수 있게 기다려주는 장소.
라디그는 단지 휴양지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를 복원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낙원이었다.
[트래블가이드 – 세이셸 3부작 완결]
세이셸은 멀고도 가까운 섬이다.
지도에서는 멀지만, 감정 안에는 오랫동안 남는다.
섬들은 떠나보낸 후에야 비로소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