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찬 기자 ㅣ 여행레저신문
3월의 자그레브를 낮에만 보고 돌아간다면, 그건 이 도시의 절반만 본 것이다.낮의 자그레브는 여느 중부 유럽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돌로 깎아낸 듯 단단한 골목, 아직 겨울의 잔기운을 품은 차가운 바람, 그리고 카페 창문 너머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커피 연기.
그러나 해가 기울고 오후 6시 30분이 되면, 도시는 마법처럼 피부를 바꾼다. 건물 외벽에 초현실적인 빛이 내려앉고, 고요하던 공원에는 형광빛 밀림이 자라난다. 중세의 탑 꼭대기에서 신호탄처럼 빛이 뻗어 오르는 순간, 자그레브의 3월은 비로소 완성된다.
캔버스가 된 중세, 빛으로 숨 쉬는 건축물
매년 봄의 문턱에서 열리는 ‘자그레브 빛 축제(Festival svjetla Zagreb)’는 단순한 조명 쇼가 아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가 무거운 겨울 코트를 벗어던지는 일종의 ‘부활 의식’에 가깝다.
올해로 8회를 맞은 이 축제는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도심 21개 장소에서 26개의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기자의 귀 끝을 스치는 몽환적인 앰비언트 사운드와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전해지는 조명의 미세한 온기는 축제의 몰입감을 더했다.
기자의 발길이 멈춘 곳은 크로아티아 공화국 광장 15번지 앞이었다. 독일의 다니엘 마르그라프(Daniel Margraf)가 선보인 ‘Connected – Embraced’는 압권이었다. 유기적으로 흐르는 빛의 선들이 석조 건물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수백 년 된 딱딱한 벽면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일렁이는 광경은 고전과 첨단 기술이 서로를 어떻게 예우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였다.
현실과 꿈의 경계, 오파토비나의 ‘네온 정글’
언덕을 올라 도착한 오파토비나 공원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티나 마르코비치(Tina Marković)의 ‘Neon Jungle’에 들어서는 순간, 시각적 충격이 전해졌다. 자외선에 반응하는 인공 식물들이 뿜어내는 생물 발광(Bioluminescence)의 풍경은 마치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현장에서 만난 관람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아꼈다. 아이들은 허공을 휘저으며 빛을 잡으려 애썼고, 어른들은 그저 멍하니 빛의 숲을 응시했다. 현장에서 만난 현지인 마르코(34) 씨는 “매일 지나던 낡은 골목이 빛을 입고 다시 태어나는 걸 보니, 도시가 나에게 비밀스러운 고백을 건네는 기분”이라며 벅찬 느낌을 밝혔다.

전통을 투사하다: 리치타르 하트의 울림
축제의 정점은 자그레브의 상징인 로트르슈차크 탑(Kula Lotrščak)과 도심 외벽을 장식한 3D 매핑 영상이었다.
특히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인 크로아티아 전통 하트 쿠키 ‘리치타르(Licitar)’ 문양이 거대한 건물 전면을 가득 채웠을 때, 광장에는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랑과 환대의 상징인 붉은 하트가 최첨단 영상 기술을 통해 도심 한복판에 구현되는 순간, 기술은 차가운 도구가 아닌 문화를 확장하는 거대한 확성기가 되었다.
“빛은 결국 계절을 바꾼다.”
2017년 단 7개 장소에서 소박하게 시작했던 이 축제는 이제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방문해야 할 유럽 행사’이자, 2026년 밀라노 동계올림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규모 이벤트로 성장했다. 자그레브는 매년 3월, 겨울이 끝나는 자리에 빛을 채워 넣으며 봄을 강제로 소환한다.
그 밤을 직접 걸어본 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자그레브의 진짜 얼굴은 햇살 아래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섬광 속에 있다는 것을.

💡 [기자가 전하는 ‘빛 축제’ 관람 꿀팁]
추천 코스: 상부 도시(Gornji Grad)에서 시작해 푸니쿨라를 타고 하부 도시로 내려오며 주요 스팟을 훑는 동선이 가장 효율적이다.
골든 아워: 조명이 가장 선명하고 몽환적으로 빛나는 시간은 오후 8시 전후다.
준비물: 3월의 자그레브 밤바람은 의외로 매섭다. 핫팩과 장갑, 그리고 돌길을 오래 걸어도 편안한 신발은 필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