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멍구, 위대한 제국으로의 시간 여행

네이멍구, 제국으로의 시간 여행

인류 역사상 유라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인 , 그 찬란한 영광의 자취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 하지만 후허하오터(후허호트)성도에서 시작한 이번 네이멍구(내몽골) 여행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8 백 년 전 천하를 호령하던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다.

축제로 하나 되는 몽골인

후허하오터는 어느 대도시 못지않은 높은 빌딩들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이곳이 경제발전의 중심지임을 알려 준다. 다음날 이른 아침 도시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과 분주한 사람들, 도시 곳곳의 건설공사로 활기가 가득하다.

130 여 킬로미터 떨어진 우란차부시로 향하는 차 안에서 초원의 지배자였던 그들 선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재도약을 준비하는 네이멍구의 밝은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란차부시의 거근타라(格根塔拉)초원관광센터에서는 7월과 8월, 10일 정도 열리는 몽골 전통의 “나다무(那達幕,몽골어로 ‘유희, 오락’의 뜻)” 축제가 열린다.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나 모든 것이 다시 풍요로워지는 여름, 몽골족뿐 아니라 인근 부족들도 함께 모여 경마, 활쏘기, 달리기 등을 하며 즐기는 전통축제다.

이 축제에 대한 기록은 칭기즈칸 시대에 나타나는데, 1 회 나다무는 1225 년에 기록된 칭기즈칸 석문에 기록돼 있다. 호라즘(화자자모)를 굴복시킨 칭기즈칸이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축제를 거행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후 나다무 축제는 대규모 행사로 계속 전승됐으며 ‘파탁이’ 즉, 영웅선발대회의 성격으로 옮겨지게 된다 .

나다무는 3가지(씨름·활쏘기·말 경주)의 기예 겨루기가 그 바탕을 이루며, 특히 씨름과 말 경주가 행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힘과 기술을 겸비해야 하는 몽골 씨름 ‘버흐(Buh, 부흐)’는 우리 씨름의 샅바 대신 상대방이 잡을 수 있도록 한 ‘죠덕’ 이라는 조끼를 입는다.

또한 출전선수의 소원을 담아 그린 길상무늬 반바지 ‘소닥(쇼닥)’과 화려한 색상의 가죽 장화 ‘구탈’로 화려함에 볼거리를 더한다.

나다무에 참가한 소년 기수

‘새마’ 로 불리는 말 경주는 관중의 호응을 가장 많이 받는 시합으로 참가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 참가 자격에 연령 제한이 없어 어린 소년과 소녀들도 참가한다. 이들은 이미 4세부터 혼자 말 타는 연습을 해왔다고 하며, 아이들의 아버지는 라마교 사원이나 악박(오보 , 서낭당), 혹은 집에서 기도를 올린 후 참여한다.

3만여 명이 운집한 축제는 몽골에서 가장 무더운 시기라는 7 월의 태양 볕만큼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다. 특히 잘 보존된 전통과 몽골인의 가슴에 내재되어 있는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의미 깊은 행사라고 볼 수 있다.

행복한 몽골인들을 위해, “옴마니 반메훔”

한반도의 5 배 이상 크기인 네이멍구자치구의 여행에서 이동 시간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도로망이 아직 완벽히 정비되지 않았고, 현재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나라이기에 이동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 피로도가 크다. 이동 시에는 휴게실도 찾아보기 어려워 음료나 읽을 책, 혹은 MP3 플레이어 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네이멍구의 농촌은 쇠락한 곳이 많다.

포장과 비포장 길을 번갈아 5 시간여를 달리며 이 광대한 땅 위에서 세계 정복을 꿈꾸던 몽골인의 기상을 그려본다. 반면 자취만 남은 건천(乾川)과 민둥산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파괴를 일삼은 인간에 대한 의문을 품어보기도 한다. 이렇듯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는 사이 네이멍구 최대 라마교 사원인 우당자오에 도착한다.

우당자오(五當召)는 중국 32대 라마 사원 중의 하나로 네이멍구자치구 내에서 가장 큰 규모다. 각종 소재로 주조된 불상 1,500여 점과 많은 보물, 그리고 다양한 불화들이 소장돼 있어 소수 민족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우당자오는 티베트 어로 하얀 연꽃을 의미하며 몽골어로는 버드나무를 칭한다. 티베트 불교라고도 칭하는 라마교는 만주 몽골 네팔에서 발달한 대승불교의 종파이며, 스승 ( 라마 ) 을 중시하기에 라마교라고 불린다. 타국의 종교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더 행복한 세상이 되길 기원하며 “옴마니 반메훔” 을 읊조린 후 세속으로 내려온다.

가슴을 뛰게 하는 영웅과의 조우

칭기즈칸(成吉思汗), 몽골제국의 창시자 묘호 태조이며 아명은 테무친(鐵木眞). 대칸을 만나러 가는 마음은 복잡하다 . 유례없는 대정복의 영웅으로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 나폴레옹, 히틀러가 수십 년에 걸쳐 건설한 영토를 합친 것보다 넓은 대제국을 불과 20년 동안 10만의 몽골군으로 건설한 대영웅이 바로 칭기즈칸이다.

사진 왼쪽 우당자오의 전경, 오른쪽 우당자오 앞의 식당은 언제나 손님들로 붐빈다.

어얼둬스시 이진훠러기의 칭기즈칸 능은 5만 5 천제곱미터로 거대하게 조성되어 있다. 1227 년 여름 칭기즈칸은 몽골 대군을 거느리고 서하 정벌을 하던 중 서하와 금나라를 멸망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8 월 25 일 청수행궁에서 병사했다. 그 시신은 몽골 본토로 후송되어 기련곡(起輦谷) 이란 곳에 안장됐다고 한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많이 안치된 기련곡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도 중국, 일본, 미국, 한국 등의 나라에서 대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

징기스칸의 묘역

본시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흰 천막 8개 (八白室) 를 상징적인 무덤으로 하여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팔백실은 알타이산 북쪽 하다이산(哈岱山) 남쪽의 어터커에 있다가 명대에 어얼둬스의 이커자오맹으로 옮겨왔다. 그 후 이진훠러기(몽골어로 ‘황제의 능’ 이라는 뜻)의 간더리 (甘德利 )초원으로 옮긴 지 3 백 년이 지났다 한다.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수립 후 중국정부는 팔백실을 유적지로 크게 재조성했다. 주요 건축물은 3 채의 몽골식 대전으로 정전의 중앙에는 칭기즈칸의 동상이 있고, 그 뒤에는 사대한국(四大汗國)의 국경을 그린 그림이 있다. 칭기즈칸의 관은 부인의 관과 함께 침궁의 중앙 링바오(靈包) 안에 모셔져 있다. 입구에 있는 6.6미터의 대칸 기마상 모습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과 약탈자의 모습이 함께 느끼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절감한다.

징기스칸 묘역의 청동군사

네이멍구 여행은 세계 유명 관광지에서 느끼지 못한 특별함을 여행자에게 선사한다. 전래된 아름다운 전통들이 불편하다는 현대인들에게는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여행을 하며 겪는 조그만 불편함은 일정 내내 따라다녔지만 다시 한 번 찾아 좀 더 깊이 있는 여행을 하고 싶은 곳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몽골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가는 길
현재 네이멍구까지 직항편은 운항하지 않는다. 북경을 경유해서 가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며 북경에서 네이멍구의 성도인 후허하오터 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네이멍구 여행은 일반적으로 이동거리가 긴 반면 휴게시설이 많지 않아 음료수와 간식의 준비가 필요하고 사막 관광의 경우 마스크와 장갑 그리고 챙 넓은 모자를 지참해야겠다.

글 사진: 이정찬 2013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