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신문 기획《프로처럼 여행하기》 프롤로그

🌍 여행, 품격을 입다

― 우리는 여행을 배운 적이 없다

[미디어원=이정찬 발행인]

요즘, 누구나 해외여행을 떠납니다.
비행기만 타면 시작되는 줄 알지만, 사실 여행은 그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시작됩니다.
가방을 꾸리기 전에, 우리는 한 가지를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바로 태도입니다.

🧭 여행이란, 낯선 세계와의 만남입니다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낯설고 새로운 공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곳에서 자신이 중심인 줄 알고 행동합니다.
현지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사진을 찍고, 식당에서 무심코 소리를 높이며,
심지어는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함으로 현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도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악의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행을 배운 적이 없었을 뿐입니다.

📚 우리는 ‘여행을 배우지 않은 세대’입니다

학교에서도, 누구에게도 ‘여행하는 법’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은 여전히 ‘감’으로 계획되고,
정보는 넘치지만 질서 없는 준비와 태도로 시작됩니다.

‘싸니까’, ‘가깝니까’, ‘유명하니까’ 떠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녀오는가입니다.

🚀 그래서, 이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프로처럼 여행하기는 단순한 여행 팁이 아닙니다.
이 시리즈는 여행도 배우는 일이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부터 항공권 예약, 호텔 위치 선정, 자유시간 활용, 보험, 수하물, 귀국 후까지.
각 단계마다 생각 있는 선택’을 제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준비 없이 해외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에 대한 정보도, 기본적인 예절도, 위험에 대한 인식도 없이 말이죠.
그러다 보니 현지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의도치 않게 무례한 행동으로 현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도 반복됩니다.

이 시리즈는 프로처럼 여유있고 품격있는 여행을 하기 위한 안내서입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준비된 태도와 정보로
누구든지 품격 있게 떠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안내서입니다.

🧩 여행은 당신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떠나는 그 한 번의 여행이
누군가에게는 한국인의 첫인상이 됩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표정 하나, 식당에서의 태도 하나가
그 나라 사람들이 기억할 한국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여행도 품격을 입어야 합니다.

📖 첫 장을 함께 엽니다

이 시리즈는 스스로 여행을 기획하고,
현지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돌아와선 다시 떠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여정을 안내합니다.

프로처럼 떠난다는 건,
남보다 더 비싸게 가거나 더 많은 곳을 돌아보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낯선 곳에서 자신을 지킬 줄 알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여행자가 되는 일입니다.

✍ 글: 이정찬
(여행레저신문 발행인, 전 파워트래블 대표, 100개국 1000도시 여행자)

알마티를 걷다 – 카자흐스탄, 서울에서 문을 열다

6월 4일, 여행레저신문이 주목하는 ‘중앙아시아의 심장’이 서울의 문을 연다.

여행레저신문 | 이정찬 기자 ㅣ 사진: @카자흐스탄관광청 

서울 도심에 중앙아시아의 바람이 분다. 6월 4일, 카자흐스탄 관광청이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관광설명회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단순한 국가 홍보를 넘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유라시아의 중심국이자 여행지로서의 카자흐스탄을 한국 시장에 본격 소개하는 자리다.

여행레저신문은 지난해부터 알마티, 누르술탄, 카자흐 초원, 차린 협곡 등 총 10편 이상의 기획 콘텐츠를 통해 카자흐스탄의 숨은 얼굴을 소개해왔다. 이번 서울 설명회는 그 흐름의 연장선에서, 독자들에게 더 깊이 있는 여행과 체험의 기회를 예고하고 있다.

‘큰 사과’ 알마티, 도시와 자연이 나란히 걷는 곳

알마티. 카자흐어로 ‘사과의 땅’을 뜻하는 이 도시는 고대부터 사과나무가 자생한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를 품고 있다. 세계 최초의 재배용 사과(Malus sieversii)가 자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도시에 대한 진짜 찬사는 사과나무보다 더 큰 자연, 바로 톈산산맥과 그 품에 안긴 호수, 협곡, 숲이 만든 압도적 풍경에 있다.

도심 속 미술관과 카페 골목이 알마티의 ‘낭만’을 이야기한다면, 도심 밖으로 조금만 나서면 ‘경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차린 캐니언, ‘중앙아시아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붉은 협곡. 바람이 깎아낸 수 백만 년의 지층은, 대지의 시간과 악수하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여행레저신문이 엄선한 알마티 신비의 명소 4選

 

해발 3,200m까지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침불락은 여름엔 고산 하이킹, 겨울엔 세계적인 스키 명소로 명성이 높다. 서울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엔 유라시아의 하늘 아래 눈밭에 서 있을 수 있다.

침불락(Shymbulak)

알마티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톈산 산맥은 거대한 자연 놀이터 역할을 한다. 특히 해발 2,200m에 위치한 침불락 스키 리조트는 겨울철 세계적인 수준의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는 이들로 북적인다. 파우더 설을 가르며 내려오는 스키어들의 모습은 알마티의 겨울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여름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웅장한 산봉우리를 감상하거나, 고산 하이킹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고도 3,200m의 탈가르 패스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산맥의 파노라마를 통해 자연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1911년 지진으로 생성된 빙하호. 수면 위로 솟은 침엽수 줄기들이 ‘물속 숲’의 몽환적인 풍경을 만든다. 마치 시간을 가둔 듯한 그곳은, 사진 한 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카인디 호수(Kaindy Lake)

알마티에서 약 4시간가량 차량으로 이동하면 만날 수 있는 카인디 호수, 톈산 산맥 깊숙한 계곡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 호수는 1911년 대지진으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형성되었다. 산비탈이 붕괴된 자리에 빗물과 지하수가 고이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호수는 지금도 침수된 침엽수의 줄기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른 독특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수온이 낮아 나무가 부패하지 않고 오랜 시간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호수의 맑은 물속으로는 마치 물속 숲을 걷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빙하수가 만들어내는 짙은 에메랄드빛 호수는 날씨와 계절에 따라 색조가 변하며 방문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자연재해가 빚어낸 독특한 지질학적 유산이자, 지금은 알마티 인근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자연 명소로 손꼽힌다. 

도심에서 한 시간 거리. 날씨에 따라 빛깔을 바꾸는 호수와 눈덮인 톈산산맥이 서로를 비추는 풍경은, 가볍게 걷기에도 충분히 경이롭다.

빅 알마티 호수(Big Almaty Lake)

도시 근교에 위치한 빅 알마티 호수는 해발 약 2,500m에 자리한 이 빙하호로, 계절과 날씨에 따라 에메랄드빛에서 터키석 빛깔까지 다채로운 색을 띤다. 호수 주변으로는 트레킹 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벼운 산책부터 본격적인 등반까지 다양한 난이도의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맑은 날에는 호수에 비치는 톈산 산맥의 설봉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여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앙아시아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붉은 협곡. 바람이 깎아낸 수백만 년의 지층은, 대지의 시간과 악수하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차린 캐니언(Charyn Canyon)

알마티에서 동쪽으로 약 3시간 거리에 위치한 차린 캐니언은 중앙아시아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린다. 수백만 년에 걸쳐 바람과 물이 빚어낸 붉은 사암 기둥들은 마치 미지의 행성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악마의 계곡(Valley of Castles)이라 불리는 구역은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며, 이곳에서 즐기는 트레킹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한다.

더 가까워진 하늘길, 더 현실적인 여행지

카자흐스탄은 더 이상 먼 나라가 아니다. 에어아스타나, 아시아나, 티웨이, 이스타항공, SCAT 등 주 8편 이상 직항 노선이 운항 중이며, 쉼켄트·비슈케크까지 확장 노선도 가시화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무비자로 30일 체류가 가능하며, 현지에서는 Yandex Go 앱 기반의 택시 서비스와 메트로·버스 등 대중교통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서울에서 만나는 실크로드의 관문

6월 4일 열리는 관광설명회는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알마티의 작은 전초기지다. 더플라자호텔 22층 다이아몬드홀에서 오전 9시 30분부터 진행되며, 누르갈리 아르스타노프 주한 카자흐스탄 대사와 김상욱 친선대사의 특별 강연, 지방 관광청 및 항공사 PT 등이 예정돼 있다.

이번 설명회는 단순한 정보 제공의 자리를 넘어, 한국과 중앙아시아가 어떻게 여행과 문화로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질적 모델이 될 것이다.

🧭 여행정보 한눈에

  • 비자: 30일 무비자 입국
  • 비행시간: 인천–알마티 약 6시간 30분
  • 통화: 텡게(KZT)
  • 교통: Yandex Go(택시), 버스, 메트로
  • 숙박: 시내 호텔, 게스트하우스, 산악 리조트 다양
  • 항공사: 에어아스타나, 티웨이, 이스타, SCAT, 아시아나

여행레저신문은 이번 설명회를 계기로, ‘알마티 트래블가이드’ 시리즈를 정식 연재할 예정이다.
실제 현지 취재와 감성 서사, 여행 동선, 숙박·음식 정보까지 담아내는 콘텐츠를 통해, 한국 여행자에게 가장 실용적이고 정직한 중앙아시아 여행의 길잡이가 될 것을 약속드린다.

유라시아의 심장, 그 맥박이 서울에서 뛰기 시작했다.

귀국 – 공항에서, 감정이 도착하지 않은 시간

알마티 국제공항. 아침 햇살이 유리벽을 투과해 마치 하늘이 바닥에 흩뿌려진 듯 환하다. 수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출장을 끝낸 듯 분주하게 노트북을 닫고, 어떤 이는 고향으로 향하는 것처럼 담담한 눈빛으로 가방을 바라본다. 슬리퍼를 신은 유럽 배낭여행자, 정갈한 정장을 입은 중앙아시아 비즈니스맨, 사리 입은 인도 여성… 공항은 언제나 이방인들의 마지막 표정이 머무는 곳이다.

그 사이에 나도 있다. 여권을 두 손에 꼭 쥐고, 다시 한번 확인한다. ‘Incheon’. 익숙한 이름. 그런데도, 이 이름은 지금 낯설다. 감정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이다. 몸은 비행편을 향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사막의 바람을 헤매고 있다.

이번 여행은 낯설고, 낯설어서 아름다웠다. 차른 캐니언의 거대한 침묵, 카인디 호수의 물속에 잠든 나무들, 콜사이에서의 숨가쁜 오르막, 알틴에멜의 바람이 만들어낸 모래의 노래… 그 풍경들은 어떤 문장보다 더 또렷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장면은, 게이트 사이 대기석의 정적 속에서 점점 흐려져 간다. 공항에서는 감정이 고장난다. 또는 멈춘다.

옆자리에 앉은 러시아 할머니는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울음을 참는 표정이다. 노란 머리의 독일 청년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그의 발 밑에는 낡은 캠핑백이 놓여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돌아가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공항은 그런 ‘이동’이 모든 삶의 조건이 되는 공간이다. 그 어떤 정착도, 그 어떤 결정도, 이곳에서는 미뤄진다.

나는 창밖 활주로를 바라본다. 하늘로 오르기 전의 비행기들이 줄지어 선 모습. 마치 기다림을 배우는 인간의 모습 같다. 그러고 보면, 여행도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해가 뜨기를, 버스가 오기를, 길이 열리기를, 감정이 따라오기를. 하지만 귀국길의 공항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진짜 기다림은 돌아온 뒤 시작된다는 것을.

돌아가면 다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익숙한 노선, 반복되는 일과, 다정한 얼굴들. 그런데 그 속에서 나는 어쩌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이 내 안에 뿌리내린 시간과 공간은, 내가 어떤 뉴스에도, 어떤 골목길에도,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게 만들 것이다. 여행이 남긴 가장 큰 흔적은 바로 ‘다른 나’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 다시 와도 같은 곳일까? 아니, 같은 곳을 다시 봐도 같은 나일까?

비행기가 도착 게이트로 들어온다. 전광판에 숫자가 바뀌고, 어딘가에서 내 감정도 천천히 도착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알마티에서 이륙했지만, 내 마음은 아직 알틴에멜의 모래 언덕 어디쯤을 걷고 있다.

공항. 사람은 떠나지만 감정은 남는다. 아니, 감정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로 나만 먼저 떠난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가장 은밀한 이유가 된다.

여행레저신문 l  이만재 기자

[카자흐스탄 트래블가이드] 알틴에멜 – 모래가 부르는 노래

알틴에멜 – 모래가 부르는 노래

아침 7시, 이번 여정은 동쪽이 아닌 북서쪽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알틴에멜 국립공원’. 이름부터 생경하다. 카자흐스탄에 국립공원이 있다는 사실도 낯설지만, 이 공원이 품고 있는 사막과 노래하는 언덕 이야기는 더 낯설다. 오늘은 그 낯섦을 만나러 간다.

알마티에서 차로 네 시간, 거리는 약 250km. 평탄한 도로가 대부분이지만, 중간 중간 비포장 구간이 나오기도 했다. 이동 중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창밖 풍경이 말을 멈추게 만들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 낮게 깔린 초지, 가끔씩 마주치는 한 채의 집. 이 나라에서 풍경은 배경이 아니라 주연이다.

도착한 곳은 ‘싱잉 듄(Singing Dune)’. 해발 약 150미터, 길이 약 3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언덕이다. 이 거대한 사구는 일종의 모래산처럼 솟아 있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악기처럼 낮고 묵직한 소리를 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언덕을 ‘노래하는 언덕’이라 불렀다. 실제로는 건조한 기후와 규사 성분의 모래가 특정 각도로 미끄러지며 마찰을 일으킬 때, 모래 입자들이 공명을 일으켜 공기의 떨림이 울음처럼 퍼지는 것이다. 그 소리는 1km 넘는 거리에서도 들릴 정도로 강하고 지속적이며, 마치 지구가 낮게 한숨을 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나는 바람을 기다리며 언덕을 천천히 걸었다. 경사는 그리 가파르지 않았지만, 모래 위를 걷는 일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발이 푹푹 빠졌고, 숨은 얕아졌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특별한 소리가 없었다. 그저 바람만 불었고, 모래는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정상에 오르자 세상이 넓어졌다. 저 멀리 일렁이는 지평선과 띠처럼 이어진 황금빛 사막. 그리고 언덕 반대편으로 펼쳐진 이리강 계곡이 언뜻 보였다. 모래 위에 나는 발자국이 쓸려가며 사라졌고, 그 순간 정말로 바람이 불었다. 처음엔 바람 소리 같았지만, 이내 땅속에서 울리는 듯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렴풋하게, 낮고 길게 이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로 들린다기보다,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노래’였다. 누가 부르는 건지, 어디서 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소리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했다.

알틴에멜 국립공원은 단지 사막만 있는 곳이 아니다. 돌산과 들판, 고대 유적이 흩어져 있고, 특히 국립공원 북서쪽 베소라무(Besshatyr) 고분군 근처에는 기원전 유목민들이 남긴 신비로운 ‘사슴돌(Deer Stones)’이 서 있다. 사람 키만 한 돌기둥에는 사슴, 태양, 무기, 인간 형상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사슴의 길게 뻗은 목과 뿔은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이 석비들은 청동기 시대 유목민들이 제사나 무덤 표시를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침묵 속에 서서 지나간 시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오직 하나의 언덕에만 머물렀다. 걷고, 멈추고, 바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하루가 저물었다.

사막은 늘 말이 없다. 대신 풍경이 말을 대신한다. 어떤 날은 침묵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의 알틴에멜이 그랬다.

여행레저신문 l 이만재 기자

[카자흐스탄 트래블가이드] 콜사이 호수 트레킹기 – 고요를 따라 걷는 세 개의 호수

이른 아침, 오늘은 걷는 날이다. 알마티에서 차를 타고 두 시간 반, 콜사이 호수(Kolsai Lakes)로 향했다. 티엔산 산맥의 품 안에 세 개의 산악호수가 계단처럼 놓여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부터 마음이 끌렸다. 물빛이 다르고, 고도가 다르고, 길도 다르다는 이 호수들을 트레킹으로 이어보는 것. 이번 여정의 작은 클라이맥스였다.

콜사이 호수는 제1호수, 제2호수, 제3호수로 나뉘며, 각각 해발 1,800m, 2,250m, 2,850m에 자리한다. 보통 여행자들은 첫 번째 호수에서 산책하거나 보트를 타는 데 그치지만, 나는 오늘 두 번째 호수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왕복 16km, 고도차 약 450m. 만만치 않은 여정이지만, 단단한 신발과 충전된 마음으로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첫 번째 호수는 정제된 정원처럼 고요하고 단정했다. 호수 위로는 노를 젓는 배 한 척이 유유히 지나가고, 주변은 거울처럼 반사된 하늘과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던 호수 위에, 나무가 그대로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드물었다. 바지자락을 걷고, 물가를 조금 걸었다. 손끝이 시릴 만큼 물은 차가웠고, 공기는 가볍고 투명했다.

본격적인 트레킹은 여기서부터다. 오르막은 초반부터 이어졌고, 나무 뿌리와 작은 자갈들이 섞인 오솔길을 따라 산을 타야 했다. 숨은 조금씩 차올랐지만, 걸음은 이상하게 경쾌했다. 주변엔 들꽃과 고산 식물이 조용히 피어 있었고, 중간 중간 작은 시냇물 소리가 흘렀다. 쉼표처럼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첫 번째 호수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두 번째 호수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정말로. 바람도, 새도, 사람도 없었다. 그 침묵 안에 들어서자, 나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물빛은 청회색에 가까웠고, 주변 산은 녹색의 스펙트럼을 섬세하게 바꾸며 호수를 감쌌다. 하늘은 조금씩 흐려졌지만, 빛은 그대로 호수 위에 머물렀다. 배도 없고, 난간도 없고, 안내판도 없는 이 호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리를 지키는 풍경이었다.

호숫가에 앉아, 준비해온 사과 하나를 천천히 베어 물었다. 산과 호수, 그리고 고요. 시간의 결을 따라 하루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겪은 기분이었다. 콜사이 호수 트레킹은 나에게 그런 날이었다.

여행레저신문 l 이만재 기자

몰타 고조섬 붉은 신화 ③ – 돌과 바다의 하루

칼립소의 전설을 뒤로하고, 고조섬의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낮게 이어지는 돌담과 투박한 창틀, 바람이 머무는 마당마다 삶의 시간이 조용히 쌓여 있었다. 이 섬의 리듬은 잔잔하면서도 깊었고, 오래된 악보처럼 선명했다. 노천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그 일상의 옆자리에서 잠시 숨을 고르듯 바람을 마셨다.

사구를 지나 염전으로 향했다. 고조의 염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사람과 햇빛과 바다가 만든 생의 문장이었다. 일부는 17세기부터 가족 단위로 운영되어 왔고, 지금도 소규모 채염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몰타의 다른 선사 유적처럼 이 염전 역시 시간이 만든 유산이며, 그 문화적 가치는 깊다. 각진 웅덩이에는 물이 고이고, 시간이 증발한 자리엔 소금의 결정이 남는다. 흰 결정을 따라가면 바다의 숨소리가 들리고, 웅덩이마다 빛이 잦아든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얼마나 오래 기다릴 수 있는지를 배운다.

길 끝의 절벽은 말을 걸지 않아도 설명이 되는 풍경이었다. 아주르 윈도우(Azure Window)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거대한 아치와 물길은 여전히 경이로웠다. 절벽 아래, 검은 실루엣들이 물속으로 사라져갔다. 스쿠버 다이버들이다. 수면과 바위, 물살과 바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데도 모든 것이 조화롭게 이어졌다. 나는 그 위에 멈춘 듯 서 있었다.

점심은 Kċina Għawdxija에서 먹었다. 토마토와 바질, 짭조름한 올리브가 고조의 햇살을 품은 라비올리 위에 퍼졌다. 향신료보다 기억이 오래 남았고, 와인 한 잔은 섬의 대화처럼 부드러웠다. 식사 후 우리는 언덕을 따라 고조 성채(Cittadella)를 향해 올라갔다. 고조의 중심에서 가장 오래된 곳, 그리고 가장 깊은 이야기가 깃든 곳이다.

성채 입구,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이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아짜 카티드랄(Pjazza Katidral)의 돌바닥은 오래된 기도처럼 단단했고, 성벽 위로는 고조의 밭과 집과 해변이 겹겹이 펼쳐졌다. Cathedral Museum과 탄약고, 피난처, 그리고 수공예 상점들까지 이 작은 도시국가의 역사와 예술이 응축돼 있었다. 몰타는 작지만, 발 닿는 모든 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이 섬 전체가 수천 년의 기억을 품은 열린 박물관이자, 시간과 자연, 인간이 함께 써 내려온 장대한 서사시의 연속된 장면이다.

성채를 나와 언덕을 굽이굽이 내려오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은 다시 바다로 기울었다. 해변의 주차지점까지는 약 15~20분, 마치 고조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는 길 같았다. 항구 앞 카페의 2층 테라스에 앉아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바다는 조용했고, 파도는 마음 깊은 곳에 부드럽게 닿았다.

푸른 창틀 아래 작은 테이블이 놓인 돌담 앞에서, 나는 다시 고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섬은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질문이 없었다. 붉은 해변과 검은 수면, 흰 석벽과 고요한 신전. 고조섬의 하루는 그렇게 천천히, 아름답게 저물어갔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기자

Photo by Jungchan Lee

마카오 다시 서울을 두드리다ㅡ2025 마카오위크 오픈

마카오정부관광청, ‘My Favorite Macao’ 슬로건과 함께 서울서 5일간 대형 로드쇼 개최

(여항레저신문=이정찬 기자) 5월 29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 낯익은 얼굴들 사이로 마카오정부관광청의 공식 로고가 박힌 배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25 마카오 위크’가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단순한 로드쇼가 아니라, 마카오가 한국을 향해 관계를 더욱 다지는 연례적 교류의 자리다. 이 행사는 이미 지속되어온 업계 간 협력 관계를 더욱 정교하게 조율하는 무대다.

행사장 입구에는 ‘MACAO Tourism + MICE Product Updates’ 및 ‘Macao Seminar & Travel Mart’ 안내 배너가 세워졌고, 내부에는 도시 풍경과 콘텐츠가 담긴 키비주얼이 스크린에 상영됐다. 프레스 명패가 정리된 좌석, 리셉션 데스크 앞에서 자료를 수령하는 업계 인사들의 모습은, 마카오와 한국의 연결이 이미 일상이라는 걸 말해준다.

마카오정부관광청은 이날 ‘Macao Tourism + MICE Product Updates Seminar & Travel Mart’라는 이름으로 2025 마카오 위크의 포문을 열었다. 한국 여행업계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더 깊어진 네트워크가 체감되는 자리였다.

공식 슬로건은 ‘My Favorite Macao’. 마카오는 더 이상 낯선 도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로 리포지셔닝을 시도 중이다. 이는 단순한 마케팅 문구가 아니라 철학이다.

2025년 마카오는 MICE 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쇼핑, 가족여행을 아우르는 복합 도시로 탈바꿈 중이다. 특히 홍콩과 연계한 자유여행 루트는 ‘목적지’에서 ‘관문’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트래블 마트에는 갤럭시 마카오, MGM, 에어마카오, 코타이 워터젯, 마카오국제공항, 샌즈 차이나 등 20여 개 기관이 참가했고, MICE 세미나에서는 다양한 전략 발표가 이어졌다. 대형 스크린 영상과 함께 이뤄진 발표에는 실무 감각과 감성이 공존했다.

‘2025 마카오 위크’는 5월 29일 세미나와 트래블 마트, 5월 30일 더현대 서울 팝업스토어, 그리고 6월 2일까지 에픽서울 행사까지 총 5일간 이어진다.

마카오정부관광청은 이번 위크를 시작으로 한국 시장에서의 브랜드 강화에 나선다. 감성을 앞세우되 전략을 잃지 않는 이들의 행보는, 여행이 상품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행은 때로, 재개보다 재인식이 중요하다. 마카오는 지금, 다시 한 번 우리 곁에 익숙하게 서 있다.

Macao Returns to Seoul – The power of Connection Rekindled

MGTO Director Maria Fernandes leads 2025 Macao Week with renewed vision and heartfelt diplomacy

 

By Jungchan Lee, Publisher and Editor in Chief, Korea Travel News

On May 29, the ballroom at the Four Seasons Hotel in Seoul was filled once again with familiar faces, familiar accents, and a shared enthusiasm for one destination: Macao.

At the heart of this rekindled connection stood Maria Helena de Senna Fernandes, Director of the Macao Government Tourism Office (MGTO), a woman whose vision has helped guide Macao’s tourism diplomacy for decades. With a calm presence and a steady smile, she addressed the delegation, underscoring Macao’s renewed commitment to the Korean market.

The 2025 Macao Week, held under the slogan “My Favorite Macao”, marked another chapter in this ongoing story. But this year felt different—broader in ambition, deeper in strategy. Macao is redefining itself as a multifaceted destination where business, leisure, family, and culture intersect.

The opening event, the “Macao Tourism + MICE Product Updates Seminar & Travel Mart”, brought together over 200 Korean travel professionals. Large LED screens displayed immersive visuals of Macao’s skyline—new resorts, enhanced infrastructure, and integrated zones.

Industry leaders from Galaxy Macao, MGM, Air Macao, Sands China, Cotai Water Jet, Macao International Airport and others formed a strategic presence, highlighting Macao’s ambition to become Asia’s next-generation MICE hub.

Maria Fernandes noted, “We are no longer just a stop for leisure. We are becoming a platform—one that connects travelers, ideas, and industries.” Her leadership, spanning decades, has anchored Macao’s relationship with Korea through both vibrant celebrations and quieter years.

In the Travel Mart, Korean partners engaged in dynamic B2B exchanges with Macao representatives, not only discussing packages but co-creating future experiences. Emotion and strategy blended seamlessly.

The celebration extended beyond business. On May 30, a public pop-up at The Hyundai Seoul introduced the broader public to Macao’s renewed identity. The festivities continue with Macao Epic Seoul until June 2.

As Maria Fernandes said, “Every year we come back, we are not just repeating. We are growing.” Her consistent presence reflects Macao’s belief in sustainable, heartfelt tourism diplomacy.

Macao doesn’t knock on the door—it returns as family. And in Seoul, that welcome is warm and lasting.

카인디 호수, 물속에 남은 숲의 시간

오늘은 카인디 호수로 간다. 아침 6시 반, 식당은 문을 열었지만 아침은 생략했다. 배는 조금 고팠지만, 마음이 더 앞섰다. 오히려 이렇게 비워진 상태로 길을 나서는 것이 어울릴 것 같았다.

물 한 병과 초코바 하나만 챙기고 배낭을 멨다. 전날 밤, 기온은 영하 가까이 떨어졌고, 알마티의 골목마다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여행은 이런 날 떠나는 게 맞다. 준비는 어설퍼도, 마음은 이상하게 단단해진다. 카인디는 쉽게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차로 몇 시간, 산길을 돌고 돌아야 비로소 그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알마티에서 동쪽으로 130킬로미터. 차를 타고 고불고불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예상치 못한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숲이 사라진 자리에 호수가 있고, 호수 안에 나무가 서 있다. ‘카인디 호수’. 이름조차 낯설고, 풍경은 더 낯설다. 하지만 이 낯섦이, 곧 이 호수의 아름다움이다.

처음 도착했을 땐 조금 얼떨떨하다. 맑고 깊은 호수 위로 검은 나무 기둥 수십 개가 물에서 솟아 있고, 그 너머엔 병풍처럼 둘러선 침엽수림과 회색의 산맥이 펼쳐진다. 풍경은 선명하지만, 정서는 흐릿하다. 차가운 호수와 말 없는 나무들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숨겨진 이야기를 찾기 위해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 거대한 지진으로 골짜기가 침수되며 이 호수가 생겼다고 한다. 그때 물속으로 가라앉은 침엽수들이 지금도 그 자리에서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잎은 사라졌지만 줄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물속의 기온이 워낙 낮아 부패가 느리게 진행되면서, 이 ‘숲의 유령들’은 100년이 넘는 세월을 이렇게 서 있다.

물은 아주 맑았다. 수면은 바람 따라 흔들렸고, 햇살은 호수를 따라 유영했다. 사진으로 볼 땐 신비로웠지만, 실제로는 묘한 슬픔이 감돌았다. 익숙한 산과 나무의 풍경이었지만, 이질적인 물이라는 매개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호수 안에서 나무가 숨을 쉬는 모습은 어쩐지 아련하고도 기묘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냥 이 풍경 앞에 잠시 멈추어 서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는 길이가 약 400미터, 너비는 100미터 남짓 되는 작은 규모였고,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좁은 숲길이 있어 그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나무가 서 있는 반대편까지 걸어가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호수는 해발 약 2,000미터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물이 유난히 차고 맑았다. 지하수가 솟거나 인근 빙하에서 녹아든 물이 계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고 있는 듯 보였고, 인근의 차른강(Chon-Kemin River)이나 케게티 계곡 쪽으로 다시 흘러나가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카인디 호수는 티엔산 산맥의 만년설에서 녹아든 물이 지하로 흘러 들어와 이루어졌으며 자연적인 증발과 호수바닥으로의 침수로 수위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 지역에서는 이 호수를 특별한 취수원으로 삼지는 않는다고 했다. 보호 목적이 크고, 호수 자체가 지극히 고요한 경관 그 자체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속에 고기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실제로 물고기를 본 적은 없었다. 현지 기사에게 물어보니, 일부 민물고기가 살기는 하나 낚시는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물고기보다 이곳의 중심은 언제나 나무였다. 물속에 뿌리박은 채 수직으로 솟은 고목들. 잎이 없기에 계절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 호수는 언제 가도 풍경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얼굴로 서 있지만, 햇살과 안개의 양에 따라 그 인상이 매번 조금씩 다르다.

사진 몇 장을 남겼고, 짧은 영상을 찍기도 했다. 점심은 호수 위쪽 숲 가장자리, 작은 평지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삶은 달걀, 사과 한 조각. 그조차도 풍경 안에서 먹으니 유난히 고요하고 특별했다. 이곳에 카페나 식당 같은 건 없다. 사람도, 소리도 드물다. 오로지 풍경과 내가 전부였다.

카인디 호수는 많은 걸 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트레킹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를 타는 것도 없다. 그저 걷고 바라보고 멈추는 게 전부다. 그리고 그 전부는, 의외로 충분하다. 세상의 많은 아름다움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인디 호수는 그런 곳이다.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풍경. 그 풍경 앞에서 사람은 조금 더 조용해지고, 조금 더 느려지며, 조금 더 진실해진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진짜 ‘나’라는 여행자를 만나게 된다.

여행레저신문 ㅣ 이만재 기자

몰타 고조섬 붉은 신화 ② – 붉은 해변, 라믈라에서 보낸 오후

바다는 조용했고,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다. 고조섬 북동쪽, 붉은 모래로 유명한 라믈라 해변(Ramla Bay)은 지중해 한복판에서 가장 따뜻한 색감을 품은 해변이다. 백사장이 아니라 붉사장. 부드러운 곡선으로 펼쳐진 해안선 위로 붉은 모래가 깔리고, 잔잔한 파도가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 해변은 단지 색만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바람이 아주 다정하게 분다. 파도는 몰타의 섬들 중 유난히 조용하다. 사람도 많지 않다. 나무 그늘도 없고, 장식도 없는 이 해변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풍부하다. 무엇 하나 인위적인 것이 없기에, 여기서는 걷고, 앉고, 바라보는 일조차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나는 라믈라 해변 입구에서 작은 언덕을 천천히 내려왔다. 한 손엔 고조산 와인이 담긴 병이 있었고, 다른 손엔 비스킷 봉지 하나.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펼쳤다. 문장은 천천히 읽혀졌고, 단어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았다. 이곳에서는 시간도 문장처럼 또박또박 흘러가는 듯했다.

멀리 보이는 탈 미스타 동굴(Tal-Mixta Cave)에서 내려다보았던 라믈라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동굴 입구의 어둠을 액자 삼아 바다를 바라보면, 해변과 바다와 하늘이 수평으로 겹쳐진다. 그 한가운데 내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해변에는 사람 몇이 조용히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모래 위에 조그만 성채를 쌓고 있었다. 아이들은 없었지만, 어른들이 모래 위에 앉아 모래를 손에 쥐었다 놓는 모습을 보며 나도 따라해 보았다. 따뜻하면서도 거친 붉은 입자들이 손바닥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것이 이 해변의 온도라고 생각했다.

한 무리의 여행객이 지나가며, 이곳이 호메로스가 말한 ‘오디세우스의 섬’이라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 풍경은 신화가 머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고, 나 역시 그 신화의 일부가 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하고,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책을 덮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와인은 햇볕과 흙의 맛이 났고, 바람은 이따금 책장을 넘기며 나의 게으름을 도왔다. 어디로도 떠나고 싶지 않았고,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있고 싶었다.

고조의 오후는 늘 그렇게 느리게 간다. 시계도 달력도 어울리지 않는 이 해변에서, 나는 작은 와인 한 잔과 붉은 모래를 기억의 가장 안쪽에 갈무리했다. 사람들은 때로 신화를 보러 여행을 간다. 하지만 라믈라에서는 신화가 사람이 된다.

그날, 나는 라믈라 해변에서 시간을 잃었다. 아니, 시간을 되찾았다. 바다가 숨을 고르고, 붉은 모래가 말없이 누워 있는 이곳에서. 나는 고조섬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기자

Photo by Jungchan Lee

몰타 고조섬 붉은 신화 – ① 거인과 님프의 섬

몰타 본섬에서 페리를 타고 20여 분, 고조섬에 도착하면 풍경은 갑자기 고요해진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돌담과 들판, 그리고 시간조차 멈춘 듯한 고즈넉한 언덕마을 Xagħra(샤라). 이곳은 관광지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삶이 이어져 온 곳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고조섬이 품고 있는 신화와 역사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 언덕 너머, 인류 문명의 시간을 되돌리는 장소가 있다. 바로 ‘지간티야(Ggantija)’ 신전이다. 고조섬의 작은 고원 위에 자리한 이 선사시대 석조 신전은, 기원전 3600년경에 세워졌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유석조 건축물’ 중 하나이며, 영국 스톤헨지보다 약 1000년 이상 앞선다. 단일 석재 무게가 수 톤에 이르고, 이를 운반해 탑처럼 쌓아올린 방식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놀라운 건 단지 구조만이 아니다. 신전의 입구는 춘분과 동지의 해돋이를 정확히 바라보게 설계되어 있다. 고대 몰타인들은 하늘과 별을 측정하고, 생명의 주기를 돌 속에 새겼다. 그들은 도구가 아닌 별자리와 손끝으로 신전을 완성했다. 이곳을 걸을 때면, 인간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우주와 연결되기를 바랐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Ggantija’라는 이름은 몰타어로 ‘거인의 탑’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신전은 한 명의 여성 거인이 하룻밤 만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거인은 인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를 위해 이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돌 하나하나에 모성애의 서사와 신화가 얽혀 있다.

신전의 바닥을 밟는 순간, 그 돌에 깃든 시간이 발바닥으로 전해진다. 무너져 내린 벽 사이에서 새싹이 피어나고, 절벽 아래 들꽃은 바람을 타고 흔들린다. 고조섬을 여행하는 이들은 종종 이곳에서 ‘기억’이라는 단어가 시간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간티야에서 길을 따라 더 걸으면 저 멀리 바다가 반짝인다. 붉은 모래로 유명한 라마라 해변(Ramla Bay)과 그 뒤편 절벽 위에는 또 하나의 전설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칼립소 동굴(Calypso’s Cave)이다.

이 동굴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님프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7년 동안 붙잡아 두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따르면,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불사의 삶을 약속하며 섬에 머물기를 권유했지만, 그는 결국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 전설의 무대가 바로 이 고조의 해안 절벽 위라는 것이다.

동굴 자체는 지금 붕괴 위험으로 입장할 수 없지만, 그 앞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라마라 해변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장관이다. 붉은 해변, 푸른 바다, 그리고 곡선을 그리는 언덕이 겹겹이 시선을 감싼다. 그 순간, 오디세우스를 홀린 것이 칼립소의 마법이었는지, 아니면 이 풍경 자체였는지 혼란스러워질 만큼 압도적인 감정이 밀려든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는 때로 고대의 숨결처럼 들리고, 해변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오래된 시처럼 반복된다. 붉은 모래의 결, 하늘의 높이,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담고 있는 바다가 말없이 존재한다. 이 섬은 말보다 오래된 이야기를 풍경으로 들려준다.

고조섬의 여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다. 선사시대의 돌무더기와 고대 전설이 나란히 공존하는 이 작은 섬은, 기억과 전설, 그리고 붉은 모래가 겹쳐진 시간의 층위다. 우리는 그 첫 장면에 발을 디뎠다.

다음 편 예고: 붉은 해변, 라마라에서 보낸 오후– “산책, 독서, 그리고 고조산 와인 한 잔. 붉은 모래 위의 느린 오후.”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기자

Photo by Jungchan Lee

핀에어, 라플란드 하늘을 연다… 오로라와 산타마을로 가는 겨울 비행

(여행레저신문-이정찬 기자) 2025년 겨울, 유럽의 하늘 위에 또 하나의 바람이 분다. 산타클로스의 고향이자 오로라의 나라,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를 향하는 하늘길이 더욱 넓어진다.핀란드 국적 항공사 핀에어는 이번 동계 시즌 동안 자사의 북극권 노선을 역대 최대 규모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눈으로 뒤덮인 침엽수림, 얼어붙은 호수, 별빛과 오로라가 춤추는 하늘. 북유럽의 그 신비한 겨울이, 더 많은 이들의 현실로 가까워지고 있다. 

라플란드는 핀란드 북부를 중심으로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 일부에 걸쳐 있는 북극권의 광대한 지역이지만, 여행자들이 꿈꾸는 ‘겨울왕국’의 중심은 단연 핀란드 쪽이다. 로바니에미, 이발로, 키틸라. 이 세 곳의 이름은 한국 여행자들에게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세계 곳곳의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는 산타마을은 로바니에미에 있다. 북위 66도, 북극권 선을 넘는 그 마을에는 진짜 루돌프가 쉬고, 진짜 산타가 편지를 읽는다.

여기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여행자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난다. 이발로는 오로라 관측 확률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로, 흐리지 않은 하늘 아래 초록빛 커튼이 춤을 추는 장면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 개썰매를 타고 눈 속을 달리다 보면 시간마저 멈춘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키틸라는 순록 썰매와 얼음 낚시, 얼음호텔 등 북극권 전통 문화와 겨울 액티비티를 체험할 수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이처럼 매혹적인 장소들로 가는 길이 핀에어를 통해 한층 가까워졌다. 헬싱키를 중심으로 라플란드 각 지역을 잇는 항공편은 전례 없이 크게 확대된다. 로바니에미 노선은 기존보다 10편이 늘어난 주 최대 72회로 운항되며, 특히 주말에는 토요일 16회, 일요일 14회 등 집중 배치된다. 이발로는 주 33회, 키틸라는 41회까지 늘어난다. 서울에서 헬싱키까지 직항으로 이동한 후, 환승 시간 1~2시간이면 눈 덮인 북극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눈 덮힌 로바니에미

 

노선 구간 최대 주간 운항 횟수 전년 대비 증편 내용 특징
헬싱키 → 로바니에미 72회 +10회 주말 집중 배치(토요일 16회)
헬싱키 → 이발로 33회 대폭 확대 오로라 시즌 중심 운항
헬싱키 → 키틸라 41회 +7회 순록·썰매 체험지 접근성 강화
서울 → 헬싱키 (직항) 7회 유지 헬싱키 허브 통한 환승 최적화
헬싱키 → 레이캬비크 11회 +4회 아이슬란드 연계 북극권 여행 가능

 

이번 증편 발표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한국 여행자들의 북유럽 수요가 실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핀에어 한국지사에 따르면, 지난 동계 시즌 동안 헬싱키 경유 라플란드행 한국인 탑승객은 전년 대비 2.5배 증가했다. SNS와 유튜브에서는 ‘오로라’, ‘산타마을’, ‘개썰매’ 등 북극권 여행 콘텐츠가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으며, 특히 2030 여성층과 4050 가족층이 주요 고객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핀에어는 또한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노선도 주 11회로 증편한다.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를 감성 여행 벨트로 연결하는 이번 항공 전략은 여행자들에게 단일 여행 이상의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라플란드에서 오로라를 만나고, 아이슬란드에서 화산과 빙하, 온천과 폭포를 둘러보는 여정은 삶의 감각을 깨우는 여정이 된다.

이처럼 겨울은 더 이상 움츠러드는 계절이 아니다. 북극권의 겨울은 차갑지만 아름답고, 어둡지만 찬란하다. 라플란드는 그 상징과도 같다. 핀에어의 항공편 증편은 더 많은 이들이 ‘겨울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다. 겨울이 가기 전, 가장 깊고 조용한 곳에서 만나는 그 풍경은, 우리 안의 무언가를 분명히 바꿔놓을 것이다.

한여름 도심에 잠깐의 안식—코트야드 메리어트의 ‘Chilling & Healing’ 패키지

(여행레저신문=이정찬 기자) 서울 영등포. 회색빛 도심 속에서 한 발 물러선 공간이 있다. 계절의 피로가 쌓여가는 6월,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타임스퀘어 호텔이 도심 한복판에 짧은 휴식을 기획했다.

호텔이 선보인 여름 한정 ‘Chilling & Healing’ 패키지는 단지 객실 할인이나 식사 혜택에 머물지 않는다.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도심에서의 작은 일탈을 원하는 이들에게 ‘호텔의 낮’을 재해석한 구성이다.

이번 패키지의 중심에는 제철 복숭아를 활용한 쁘띠 빙수 세트가 있다. 5층 모모바에서 제공되는 이 디저트는 커피 두 잔과 쿠키가 함께 나오는 미니 구성이지만, 단순한 디저트 이상의 풍경을 만든다.

유리창 밖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차가운 빙수 한 스푼을 떠올리는 순간이 곧 ‘호텔에서의 낮’이라는 감각을 깨운다. 체크인 시간 전이나 체크아웃 이후의 빈틈 시간, 그 무엇도 계획하지 않은 시간의 휴식이 바로 이 패키지의 숨은 장치다.

패키지에는 모모카페 조식 뷔페 2인 이용권이 포함되며, 추후 모모카페 런치 또는 디너 뷔페에 사용할 수 있는 25% 할인 바우처도 함께 제공된다. 이 바우처는 투숙 이후 2025년 9월 30일까지 유효하여, 호텔을 단순히 하루의 공간에서 일상의 재방문처로 확장시킨다.

패키지는 2025년 6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투숙 가능하며, 예약은 5월 26일부터 오픈됐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타임스퀘어 공식 인스타그램(@courtyardseoul)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텔 마케팅팀 이하은 지배인은 “이번 칠링 & 힐링 패키지는 짧은 여름의 공백을 채워주는 도시 속 쉼표”라며 “서울의 한가운데서도 여행처럼 느낄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차른 캐니언, 바람이 깎아낸 협곡의 시간

알마티를 출발한 지 세 시간쯤 흘렀을까. 땅빛이 점점 붉어진다. 고요했던 초원이 갈라지며 계곡의 입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람의 손보다 바람과 시간이 먼저 지나간 흔적들. 거대한 붉은 절벽은 말없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이어진 길은 협곡의 입 속으로 이어진다. 카자흐스탄의 차른 캐니언이다.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이곳이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걸 느꼈다. 붉은 바위는 누군가의 얼굴 같기도 하고, 껍질처럼 벗겨진 세월의 단면 같기도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수록 햇살의 각도가 바뀌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협곡은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았다. 흙이 사락사락 무너지는 소리, 돌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리는 까마귀 울음.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지층은 마치 오래된 책장 같았다. 어느 한 줄기 벼랑은 깊은 주름을 가진 노인의 얼굴을 닮았고, 둥그런 바위는 아이가 쥔 점토 덩이처럼 순진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무게만큼은 분명히 느꼈다. 그건 역사의 무게도, 자연의 장엄함도 아닌, 그냥 바람이 깎고 지나간 풍화의 감정 같은 것이었다.

협곡 아래까지 내려가자 길이 좁아졌다. 벽은 더 가까워졌고, 하늘은 사각형처럼 작아졌다.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니, 붉은 절벽 틈으로 햇살 한 줄기가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한 줄기 빛이 나를 협곡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이곳을 ‘카자흐스탄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어쩐지 이곳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여기는 ‘누군가가 다녀간 자리’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데도 계속 있는 곳’이다. 자연이 스스로를 조각해낸 풍경.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있어온,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고요한 증언.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협곡의 바위들처럼 입을 다물고, 그저 침묵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용해졌다. 여행은 종종 ‘어디를 보았는가’보다 ‘어떻게 머물렀는가’로 기억된다. 이 협곡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행레저신문 l 이만재 박사

파워골프를 다시 시작하며: 골프는 오늘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캐디백을 카트에 올린 채, 조용히 필드를 걷는 한 사람. 아침 햇살이 그의 어깨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파워골프를 다시 시작하며

이정찬 | 티칭프로 · 여행레저신문 발행인

골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21세기의 대표 스포츠다.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이 양들과 보내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장난처럼 시작한 이 놀이는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글로벌 스포츠가 되었다.

아침마다 연습장을 찾는 직장인, 주말이면 티타임을 확보하려는 중년들, 유튜브를 보며 스윙을 흉내 내는 학생들까지. 골프는 더 이상 일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의 문화이고, 관계의 매개이며, 때로는 자신을 다듬는 거울 같은 존재다.

하지만 골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이 스포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정성을 다한 골퍼에게조차, 기쁨보다는 당혹감, 성취보다는 좌절을 안겨주곤 한다. 어제 맞았던 샷이 오늘은 어이없이 벗어나고, 이유조차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지기 십상이다.

“Golf is deceptively simple and endlessly complicated; it satisfies the soul and frustrates the intellect.”
— Arnold Palmer

골프는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끝없이 복잡한 스포츠입니다. 마음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 낯선 용어들, 복잡한 장비들, 무수한 스윙 교정과 기술 조언들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잊는다. 골프는 단지 공을 치는 운동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백돌이의 시기를 지나, 보기 플레이어가 될 즈음 우리는 깨닫는다. 골프는 스코어보다 마음가짐이 더 많은 것을 좌우하는 운동이며,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방식과도 많이 닮아 있다.

티박스 위, 한 남자의 피니시. 햇살이 잔디를 가르고, 그날의 첫 스윙이 숲을 향해 날아간다.

파워골프를 다시 시작하면서 골프책 한 권을 함께 써나가고자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레슨서도, 철학서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누구나 편하게 읽고, 때로는 피식 웃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살짝 가벼워지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티박스에 서면 누구나 한 번쯤은 ‘오늘은 좀 멋지게 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이 책은 바로 그 마음에서 출발했다.

골프를 잘 치는 법보다는, 골프를 편하게 대하는 법. 이 책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의 골프도, 당신의 하루도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The most important shot in golf is the next one.”
— Ben Hogan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샷은, 다음 샷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잘할 수 있다.

몰타 감성 칼럼 ⑤ — 몰타의 테이블, 기억을 마시는 저녁

어두운 와인바 내부에서 파스티치와 와인이 나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조명이 은은하게 감싸고 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특별한 걸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먹기로 했다. 천천히, 기억이 될 음식을. 몰타의 어느 와인바에서, 어느 저녁에, 그저 한 끼를 깊이 음미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은 결국 한 끼에서 기억된다.

슬리에마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 행정청사와 고급 주택가가 섞인 마르사막슬록(Marsamxett Harbour) 쪽에서 점심을 먹었다. 요트가 길게 정박해 있는 항구 옆 해변 카페였고, 테이블은 거의 바다 위에 걸쳐져 있었다. 전날의 고조섬 일정이 길어 아침을 건넜기에, 허기가 져 있었고 덕분에 맛은 더욱 진해졌다.

슬리에마 해변 점심slima-lunch-harbour-view 요트가 정박한 항구 옆 테이블에 칼라마리와 파스타가 놓여 있고, 바다 위 햇살이 번진다.
슬리에마 해변 점심 slima-lunch-harbour-view 요트가 정박한 항구 옆 테이블에 칼라마리와 파스타가 놓여 있고, 바다 위 햇살이 번진다.

전채로 ‘칼라마리 튀김’을, 메인으로는 ‘스파게티 마레’를 주문했다. 튀김은 아주 얇고 바삭했고, 해산물 파스타엔 토마토 소스 대신 올리브오일과 화이트와인, 바질 향이 은근히 배어 있었다. 오징어는 바삭한 껍질 아래 부드럽게 익어 있었고, 파스타 면은 ‘알덴테’ 그 자체였다.

짠내 나는 바람과 레몬 향이 어우러져 입 안을 깨우는 점심이었다. 옆자리 노부부는 와인 한 잔에 빵을 곁들였고, 청춘 커플은 디저트만 시켜 놓고 한참을 대화했다. 나는 조용히 포크를 들었다. ‘이 도시의 리듬 속에 내가 들어온 것 같았다.’

그 식당에서 마신 하우스 와인은 이날 마신 와인 중 가장 인상 깊었다. 강하지 않았지만 균형 잡힌 산도와 신선한 향. 나중에 알아보니, 몰타 본섬 내륙의 작은 협동농장에서 만든 소규모 생산 와인이었다. 그 맛은 바다보다 땅을 닮아 있었다. 포도보다 흙이 먼저 떠오르는 와인. 나는 두 잔을 마시고 천천히 산책을 시작했다.

어두운 와인바 내부에서 파스티치와 와인이 나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조명이 은은하게 감싸고 있다.
어두운 와인바 내부에서 파스티치와 와인이 나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조명이 은은하게 감싸고 있다.

저녁은 다시 발레타에서, 골목 안 작은 와인바에서 이어졌다. 나무 탁자와 낮은 조명, 그리고 기분 좋은 정적. 바텐더는 고조섬산 화이트를 권했다. 첫 모금은 라임 껍질의 산미와 함께. 바질향과 짠내를 머금은 바람이 입 안을 맴돌았다. 목넘김은 부드러웠고, 바닥엔 석회암 가루 같은 텁텁한 여운이 남았다.

“이건 돌에서 자라요.” 그가 말했다. 몰타의 포도는 비옥하지 않은 석회암 지대에서 자란다. 그래서일까, 향은 절제되어 있고, 여운은 길었다. 나는 그 잔을 마시며 처음 몰타에 도착했던 날을 떠올렸다.

첫 번째 요리는 ‘파스티치(Pastizzi)’. 페이스트리 속에 리코타 치즈나 으깬 완두콩이 들어간 몰타식 간식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길거리 어디서나 팔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파스티치는 그 어느 곳보다 깊었다. 바삭한 껍질이 입 천장에서 부서질 때, 안쪽 치즈가 고소하게 녹아내렸다. 빵 하나에도 구워진 햇살이 있었다. 이것이 몰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지만 진심인 것.

두 번째는 ‘팬프라이드 래빗 스튜(Rabbit Stew, Stuffat tal-Fenek)’. 몰타의 대표 음식이다. 양파, 마늘, 토마토, 레드와인으로 조린 토끼 고기는 씹을수록 단단하고, 맛은 의외로 순하다. 육질은 닭고기보다 진하고 소고기보다 부드럽다. 몰타 사람들은 이 요리를 가족이 모이는 날, 혹은 축일에 함께 먹는다 했다. 향은 허브와 레드와인이 어우러져 진하고 깊었다. 나도 어느새 그들처럼 혼자가 아닌 듯 식사를 이어갔다.

고조섬의 와인과 햇살이 어우러진 평온한 시음 장면

고조섬에서 마셨던 와인을 떠올렸다. 탈 미에나(Ta’ Mena) 와이너리. 돌길 끝에 펼쳐진 포도밭과 와인 셀러. 와인 잔을 들고 석양을 바라보던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을 병에 담는 사람들이죠.” 와이너리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몰타의 와인은 말이 없고, 설명이 없고, 그저 흘러든다. 마치 섬 전체가 와인 한 잔이 되는 기분이었다. 돌, 바람, 태양, 침묵, 그리고 오래된 믿음.

마지막은 몰타식 빵 ‘프티라(Ftira)’와 올리브오일. 몰타의 프티라는 단단한 외피 안에 신선한 토마토, 양파, 참치 혹은 캡퍼가 들어간다. 투박하지만 정직하고, 무엇보다 밥보다 더 따뜻한 빵이다. 씹을수록 토마토와 허브의 향이 올라왔고, 올리브오일은 맑고 풀잎 냄새가 났다. 그 빵을 조용히 씹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섬의 맛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오래간다.

음식은 때로 말보다 많은 것을 설명한다. 그 나라의 기후, 역사, 풍경, 사람. 몰타는 입으로 만나는 섬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혀가 먼저 기억하는 섬. 한 끼가 한 계절 같았고, 한 모금이 한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괜히 뒤를 돌아봤다. 자주 앉지 않던 창가 자리에 와인 한 잔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빛이 유리잔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The wine was made of sun, the bread was made of time. And the table? That was where Malta finally spoke.”

몰타는 그렇게, 테이블 위에서 자신을 말하는 섬이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발행인

Photo by Jungchan Lee

몰타 감성 칼럼 ④ — 낯설고 오래된, 몰타의 숨은 얼굴들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곤 한다. 고조섬에서 돌아온 날 밤, 나는 숙소 창가에 앉아 몰타 지도를 다시 펼쳤다. 익숙한 지명들 사이에 낯선 단어들이 있었다. Mdina, Blue Grotto, The Three Cities, 그리고 공항 근처 작은 와이너리 이름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이 섬의 절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몰타의 중심부,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엠디나(Mdina). ‘침묵의 도시(Silent City)’라는 별명이 있는 이곳은 한때 몰타의 수도였다. 오늘날에도 차량의 도심 진입은 제한되어 있으며, 골목엔 말 발자국 소리와 바람 소리만 울린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는 이곳은 마치 시간의 틈새 같다. 중세풍 저택들 사이로 붉은 노을이 스며드는 순간, 도시 전체가 한 권의 책처럼 펼쳐진다. 마치 누군가 읽다 덮어둔 오래된 이야기의 중간 페이지.

몰타 남서쪽 해안에는 블루 그로토(Blue Grotto)가 있다. 햇살이 수직으로 떨어질 때, 동굴 안 바위와 바닷물이 만들어내는 빛의 푸른 조화는 초현실적이다. 작고 낡은 나무 배를 타고 진입하는 동굴 속은 마치 바다 속 성소 같았다. 어쩌면 몰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랑이 그곳에 있었다. 관광객들이 탄성을 지르던 순간에도 나는 조용히 손을 담가보았다. 그 파랑은 찬물처럼 투명했고, 모든 것이 사라질 것처럼 순수했다.

발레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삼시티즈(The Three Cities)’는 몰타 기사단의 첫 정착지였다. 빅토리오사(Vittoriosa), 센글레아(Senglea), 코스피쿠아(Cospicua). 이 도시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낡은 요새, 작은 교회, 허름한 항구 창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살아 있는 역사’가 있다. 특히 빅토리오사에서는 기사단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인퀴지션 궁과 병원터, 그리고 좁은 돌길 위 어스름한 오후 햇살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공항 활주로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와이너리. 처음 몰타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창밖으로 보았던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한때 폭격의 표적이던 활주로 주변 땅이 지금은 포도밭이 되었다는 사실. 그 와인은 분명히 그 땅의 시간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끝내 그 와이너리에 가지 못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몰타의 아이러니였다. 상처 위에 꽃이 피고, 전쟁 위에 향이 자라고, 기억 위에 와인이 담긴다.

몰타에는 ‘코미노(Comino)’라는 아주 작은 섬도 있다. 겨우 몇 가구만이 사는 이곳은 블루라군(Blue Lagoon)으로 유명하다. 투명한 옥빛 바다와 하얀 바위,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카페 하나. 배가 닿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느려지고, 걷기 시작하면 더는 돌아갈 필요가 없어지는 곳이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그 섬에 하루쯤 멈춰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시간을 바라보는 하루.

몰타는 작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무한하다. 다 본 줄 알았던 도시의 골목에도,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 길목에도, 새로운 감정이 숨어 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이 섬을 ‘끝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덮는다’고 말한다. 언제든 다시 펼칠 수 있는 이야기책처럼.

“You don’t finish Malta. You leave it open, like a book with a bookmark.”

몰타는 그렇게, 다 읽히지 않는 섬이다. 남겨둔 기억이 많을수록, 다시 돌아올 이유가 더 선명해지는 그런 섬이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발행인

Photo by Jungchan Lee

[카자흐스탄 트래블가이드] 카자흐스탄에서 바람은 남쪽으로 분다

지도를 펼쳤다. 종이 위의 땅은 조용하고 평평했다. 그러나 그곳에 이름을 얹는 순간, 풍경은 언어를 얻고, 낯선 대륙은 내 안에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카자흐스탄’이라는 여섯 글자가 어느 순간 가슴에 걸렸다. 그리운 것도 아니고, 막연한 동경도 아닌데, 자꾸만 눈이 머문다. 바람의 나라, 초원의 그림자, 불그스름한 협곡.

여행은 늘 거기 없던 문을 여는 일이다. 일상이라는 실내에서 한 걸음만 바깥으로 나가면,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온도가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난다. 우리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는 잊고 있던 질문을, 낯선 공간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게 되묻곤 한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카자흐스탄은 그 물음에 다소 느린 목소리로 대답하는 나라다. ‘금방 재미있어지는’ 곳이 아니다. 한 도시를 다 돌고 나서도 손에 들어오는 인상은 적다. 대신 가슴에 머무는 감각은 묵직하다. 협곡의 단면보다, 협곡을 마주했을 때의 정적이 더 오래 남는다. 호수의 물빛보다, 그 앞에서 아무 말 없이 함께 선 누군가의 기척이 더 또렷하다.

카인디 호수엔 나무가 물속에 서 있고, 콜사이 호수의 물빛은 하늘보다 진하다. 침블락의 만년설은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압도한다. 차른 캐니언은 땅이 울리는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 알틴에멜 국립공원의 사막은 노래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경관은 사진으로 보면 반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나머지 반은 그 자리에 있을 때, 바람을 맞고, 흙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늘과 햇살의 경계를 천천히 걷고 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다.

사람보다 자연이 더 많은 나라. 도시보다 하늘이 더 가까운 나라. 이 나라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조용히 있을 뿐이다. 대신 보는 이가 먼저 마음을 기울이면, 땅이 살며시 반응한다. 그래서일까. 카자흐스탄에서 느끼는 감동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여행이 있다. 떠나기 전보다 돌아와서 더 깊어지는 여정. 카자흐스탄은 아마 그런 나라다. 지금 당장 가지 않아도 괜찮다. 이 글을 읽은 어느 날, 당신의 마음이 먼저 그곳에 닿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진짜 발을 디뎠을 때, 이미 익숙한 바람이 당신을 맞이하길.

그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올 것이다.

여행레저신문 l 이만재 기자 

[카자흐스탄 트래블가이드] 중앙아시아의 심장에서 만나는 자연과 문명의 숨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실크로드의 지층 위에 서 있는 나라.

카자흐스탄은 지금, 여행자들의 시선이 머무는 새로운 이름이다. 인구는 약 2천만 명. 세계 9위의 국토 면적(약 272만㎢)을 가진 이 나라는, 도시보다 풍경이 먼저 시야를 채우는, 인간보다 자연이 먼저 말을 거는 드문 공간이다. 초원과 사막, 만년설과 침엽수림, 붉은 협곡과 물속의 숲이 하나의 풍경 속에 공존하는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시간과 지층이 교차하는 대륙의 정면이다.

카자흐스탄은 중국 시안에서 출발해 유럽까지 약 6,5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핵심 경로에 자리 잡고 있다. 투르키스탄, 타라즈, 샤브락 등 고대 교역 도시들이 이 지역에 들어서며, 동서 문명이 교차하던 관문이자 유목과 정착이 맞닿은 접점이기도 했다. 이 ‘교차의 감각’은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도시와 마을, 음식과 언어, 건축과 풍경 속에 다면적으로 살아 있다.

러시아, 중국,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동서로 약 3,000km에 달하는 땅 위에 펼쳐진 고원과 협곡, 호수와 설산은 이 나라가 단지 크기만 큰 국가가 아니라, 기후와 문화, 언어, 종교가 혼재하는 거대한 풍경의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중심에는 알마티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자 여전히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인 이 도시는, 고산지대와 도시적 삶이 공존하는 색다른 출발점이다.

카자흐스탄 여행의 적기는 보통 5월에서 6월, 그리고 9월에서 10월 사이다. 여름의 고원은 햇살과 바람이 선명하고, 가을의 산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겨울은 혹독하고 여름은 지역에 따라 무덥지만, 고산 지역에서는 한결 쾌적하다.

카자흐스탄에서 주목할 만한 풍경들은 단순히 ‘예쁜’ 수준을 넘어선다. 각각의 장소가 그 자체로 고요한 서사이자 시적인 울림을 품는다. 사진이 먼저 말을 걸고, 그 뒤에야 설명이 따르는 듯한 이 풍경들은, 경험하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차른 캐니언 (Charyn Canyon)

카자흐스탄 동남부 알마티 인근에 위치한 차른 캐니언은 약 1,200만 년 전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붉은 사암 협곡이다. 길이 약 154km, 깊이는 최대 300m에 달하며, ‘미니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릴 만큼 장엄한 절벽과 기괴한 암석 형상이 매혹적이다. 사막과 초원이 맞닿은 지형에 있어 해가 질 무렵에는 절벽이 붉게 타오르듯 물드는 광경이 연출된다. 하이킹 코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카인디 호수 (Lake Kaindy)

알마티에서 약 130km 떨어진 고산지대에 위치한 이 호수는 1911년 지진으로 형성된 이색적인 자연현상이다. 침엽수림이 침수되어, 호수 한가운데 고사목이 우뚝 솟아 있는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든다. 고요한 물빛은 초여름에는 녹색, 가을에는 남청색으로 변하며, 수면 위로 드러난 나무줄기는 마치 수묵화를 닮았다. 사진 애호가들과 자연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콜사이 호수 (Kolsai Lakes)

콜사이 호수는 ‘하늘의 거울’이라 불릴 만큼 청정하고 깊은 산악호수 세 곳이 계단식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고도별로 호수의 색감과 주변 생태계가 다르게 펼쳐지며, 트레킹과 하이킹, 고요한 캠핑에 모두 적합하다. 특히 중간 호수까지 이어지는 8km 가량의 산책길은 숲, 계곡, 들꽃이 어우러져 여행자의 숨을 고르게 한다.

침블락 (Shymbulak)

알마티 시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침블락은 해발 약 2,260m에 자리한 고산 스키장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티엔샨 산맥의 절경이 펼쳐지며, 겨울엔 설산, 여름엔 고원 초원이 장관을 이룬다. 정상에서는 알마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인근에는 유럽풍 산장과 카페도 있어 사계절 내내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알틴에멜 국립공원 (Altyn-Emel National Park)

면적 약 4,600㎢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국립공원은 ‘노래하는 모래언덕(Singing Dune)’과 ‘일곱 가지 색깔의 산(액토가이)’ 등 독특한 지형이 공존하는 자연생태의 보물창고다. 야생 말, 가젤, 독수리 등 멸종 위기 동물도 관찰할 수 있으며, 고대 암각화와 전설이 얽힌 유적지도 곳곳에 남아 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카자흐스탄인가?
한국인 여행자들이 선호해온 일본, 베트남, 태국, 유럽과는 결이 다르다. 여기는 관광 인프라가 덜 정비된 만큼, 더 원형에 가까운 자연과 문화가 남아 있다. 한적하고 고요한 땅, 서두르지 않는 풍경, 오히려 그러한 낯섦이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여행자에게 깊은 쉼을 제공한다. 인스타그래머블한 맛집이나 쇼핑 대신, 사막의 바람과 호수의 거울이 남는 곳. 트레킹, 사진 여행, 문화 답사형 여행에 모두 적합하며, 개인이나 2~4인 단위 맞춤 여행으로도 유연하게 설계 가능하다.

물론 단점도 있다. 항공료는 평균 100만 원 전후로 비수기 특가를 제외하면 결코 저렴하진 않다. 언어의 장벽(카자흐어·러시아어)과 대중교통 미비, 예약 시스템의 불편함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은 동시에 이 땅이 아직 손때 묻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현재 인천 알마티 노선은 아시아나항공이 주 4회, 에어 아스타나가 주 3회, 이스터항공이 주 2회 운항 중이며 왕복 항공권은 평균 80만원에서 120만 원 선이다. 현지에서는 주로 전용 차량 투어나 렌터카 이동이 이뤄지며, 수도 아스타나와의 국내선도 운항 중이다. 

화폐는 텡게(KZT), 대도시에서는 신용카드 사용이 대부분 가능하다. 유심 또는 eSIM을 통한 데이터 사용도 비교적 원활하며, 공항이나 시내 대형 마트에서도 현지 유심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시차는 한국보다 3~4시간 느리며, 복장은 보수적일 필요까진 없으나 이슬람 문화권 특성상 일정한 절제와 예의가 요구된다.

카자흐스탄은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되기 어렵다. 그 점이 바로 이 나라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질적인 자연, 다면적인 역사, 다층적인 문화가 어우러진 이 땅은, 지금 ‘여행’이라는 단어에 새로움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 듯 가까운 응답이 된다.

여행레저신문 l 이정찬 기자 

초원과 빙하, 사막과 호수가 공존하는 ‘중앙아시아의 심장’을 걷다

바람과 바위가 나눈 오래된 대화, 그 땅의 이름은 카자흐스탄

 
(여행레저신문=이만재 기자) ‘카자흐스탄’. 지구의 한가운데서도 가장 넓고, 가장 고요한 땅. 이곳은 바람과 바위가 수천 년을 걸어 쓴 풍경의 기록이다. 중국 시안에서 출발, 유럽까지 장장 6,500킬로미터에 걸쳐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했던 실크로드의 거점 지역으로서, 카자흐스탄은 동서 문명의 교차점이며 교역의 중심지들인 투르키스탄, 타라즈, 샤브락 등과 활발히 교류해왔다.

이 땅은 유목의 리듬과 소련의 흔적, 이슬람의 고요가 지층처럼 쌓여 있는 곳이며 과거 유목 제국의 통로이자, 냉전기의 핵실험장이었고, 지금은 독립된 다민족 국가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이 모든 층위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인 카자흐스탄, 여행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걷는 일이라면, 카자흐스탄은 그 둘을 가장 극적으로 겹쳐 보여주는 지도다.

그 중심에는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도시 알마티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자 지금도 문화와 예술, 경제가 밀집된 도시. 하지만 진짜 여정은 도시를 벗어난 자리에서 시작된다. 차른 캐니언의 붉은 협곡, 물속에 잠긴 숲 카인디 호수, 알프스를 닮은 침블락 설산까지. 경계 없는 풍경이 하나의 지도 위에 펼쳐진다.

최근 국내외 항공사의 알마티 직항 노선 확장으로, 이 거대한 땅은 훨씬 가까워졌다. 현재 인천에서 알마티까지 직항 노선은 아시아나항공이 주 4회, 에어아스타나(카자흐스탄 국적 항공사)가 주 3회 운항하고 있으며, 일부 저비용항공사(LCC)도 신규 취항을 준비 중이다. 평균 항공권 가격은 왕복 기준 80만~120만 원 선으로, 비수기에는 70만 원대 특가도 가능하다. 그에 따라 다양한 여행사들이 새로운 노선과 테마를 접목하고 있다.

하나투어가 이 지역을 연결하는 여행 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 상품은 ‘카자흐스탄 5일’과 ‘6일’ 일정으로, 차른 캐니언, 카인디 호수, 콜사이 호수, 침블락 설산 등을 방문하며, 일정에 따라 알틴에멜 국립공원과 아씨고원도 포함된다. 출발가는 약 139만 원부터 시작되며, 계절과 항공편에 따라 달라진다. 대자연 속에서 색감과 지형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이 루트는 비슷한 풍경에 지친 여행자에게 특히 추천할 만하다.

젊은 감각의 ‘밍글링 투어 로드트립’은 자유여행 요소를 결합했고,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을 연계한 ‘중앙아시아 7·10일’ 상품도 마련돼 있다. 구성은 단순한 포인트 나열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자연과 문명의 지층을 따라가는 구조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이 땅은 낯설다. 하지만 그 낯섦은 바로 이 나라의 힘이다. 익숙하지 않기에 우리는 더 눈을 크게 뜨게 되고, 미지이기에 더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 이방인이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풍경, 카자흐스탄은 그런 방식으로 여행자를 환대한다.

단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왜 떠나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이 땅엔 있다.

카자흐스탄은 더 이상 머나먼 대륙이 아니다. 바람과 바위가 속삭이던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발 아래로 당도했다.

이박사의 와인스쿨 ① 와인은 어떻게 인류의 술이 되었을까

술은 인간의 기억을 담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그 중에서도 와인은 유독 오래되고, 유독 사람 냄새가 짙다. 와인은 인류가 처음으로 마신 술이자, 가장 먼저 잊지 못한 술이다.

오늘날 와인의 시작은 대개 조지아(Georgia)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캅카스 산맥 아래,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 사람들은 포도송이를 따서 그릇에 보관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포도는 스스로 발효되었다. 그 결과 생겨난 붉고 탁한 액체, 그것이 와인의 최초 형태였다.

와인의 기원을 설명할 때, 학자들은 발효의 과학항아리의 역할을 먼저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더 깊이 남는 건 언제나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다.

고대 페르시아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왕궁의 창고에 보관되던 포도 항아리 하나가 변질되었다. 상한 냄새가 났고, 거품이 일며 부패한 액체로 여겨졌다. 궁중 무희 한 명은 실연의 슬픔에 목숨을 끊으려 그 항아리의 내용물을 마셨다.

그런데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그녀는 그 사실을 왕에게 알렸고, 왕은 그 술을 “생명을 되돌리는 신의 음료”라 칭하며 백성에게 마시게 했다. 와인은 그렇게 ‘슬픔의 술’에서 ‘기쁨의 술’로 태어났다.

이집트의 왕들은 포도주를 무덤에 함께 묻었고,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는 술과 광기의 신이 되었다. 로마의 병사들은 출정 전 와인에 빵을 적셨고, 성직자들은 미사의 피로 와인을 올렸다.

하지만 와인이 일상 속 술이 된 건 중세 수도원부터 였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수도사들은 포도밭을 일구고 와인을 만들었다. 그들은 품종을 기록했고, 해마다 포도의 성질을 기록하며 지중해 와인의 DNA를 만들었다. 우리가 아는 ‘보르도’, ‘부르고뉴’라는 이름은 그들의 손에서 태어난 지역의 이름이었다.

이후 유럽의 식민지 확장과 함께 와인은 지구 반대편까지 퍼졌다. 스페인은 남미로, 프랑스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포르투갈은 브라질로 포도나무를 가져갔다. 이제 와인은 칠레, 아르헨티나, 남아공, 호주, 캘리포니아에서도 자란다.

나는 몰타의 어느 저녁, 붉은 와인을 한 잔 마셨다. 햇살에 그을린 돌담과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테라스에서, 그 와인을 마시는 순간, 나는 그날의 햇빛과 오래된 사람들을 함께 마시는 기분이었다.

 

와인은 오래됐지만 낡지 않았다. 와인을 마신다는 건, 잊지 못할 순간 하나를 천천히 다시 음미하는 일이다.

 
미디어원 Forecast
  • 와인은 인류가 가장 먼저 마신 술이자,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할 술이다.
  • 8천 년 전 항아리 속에서 시작된 이 술은, 오늘날 여행자의 감정에도 여전히 머문다.
  • 다음 회차에서는 레드, 화이트, 로제의 차이와 입문자 추천 와인을 소개합니다.

미디어원 l 이만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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