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들고 여행을 떠나던 시대에서, 이제는 책 속 세계 자체를 찾아 여행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로맨스와 판타지를 결합한 이른바 ‘로맨타지(Romantasy)’가 출판 장르를 넘어 여행 트렌드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중세 성곽이나 오래된 마을, 신화가 남은 유적, 영화 속에 등장한 산과 숲을 찾아가면서 현실에서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경험하려는 여행이다.
부킹닷컴이 21일 공개한 아시아·태평양 여행지 제안에서도 이런 흐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자체 ‘2026 여행 트렌드’ 조사에서 한국 응답자의 76%가 로맨타지에서 영감을 받은 여행지에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글로벌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1%가 로맨타지를 연상시키는 목적지를 방문하는 데 관심을 나타냈다.
단순히 예쁜 장소를 찾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관광객이 어떤 이야기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얼마나 강하게 받을 수 있는지가 목적지 선택의 기준이 된다. 전주의 한옥 골목과 일본 산촌, 인도의 고대 제국 유적, 뉴질랜드 영화 촬영지가 하나의 여행 트렌드로 묶이는 이유다.
전주,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 ‘궁중 로맨스’가 된다
전주한옥마을은 수백 채의 한옥이 골목을 따라 이어지고 경기전·오목대·전주향교 등 역사 공간이 한곳에 모여 있다. 한복을 입고 골목을 걷거나 실제 한옥에서 머무르면서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가능하다.
부킹닷컴이 함께 소개한 한옥혜윰 역시 전통 목조 구조와 마당을 갖춘 숙소다. 서양의 성이나 마법의 숲 대신 한국식 고전 로맨타지의 무대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6개 여행지 가운데 가장 색다르다.

시라카와고, 실제 주민이 살아가는 ‘동화 마을’
일본 기후현 시라카와고는 가파른 초가지붕의 갓쇼즈쿠리 가옥으로 유명하다. 시라카와고 오기마치와 고카야마의 아이노쿠라·스가누마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다.
겨울 눈이 쌓이면 판타지 영화의 세트처럼 보이지만, 이곳의 매력은 실제 주민의 생활과 전통 건축이 여전히 이어진다는 데 있다.

함피, 폐허가 된 제국이 판타지보다 강하다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주의 함피는 만들어진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사라진 제국의 수도다.
함피는 14~16세기 남인도를 지배했던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수도였으며, 현재 수많은 사원과 궁전, 시장, 수리시설, 방어시설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 사이에 궁전과 사원의 폐허가 펼쳐지는 풍경은 별도의 세트가 필요 없을 만큼 강렬하다.

글레노키, 영화 속 판타지가 실제 지형이 된 곳
뉴질랜드 남섬 글레노키는 로맨타지 여행이라는 개념을 가장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장소다.
와카티푸 호수와 서던알프스, 원시림과 넓은 계곡이 이어지는 이 지역은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여러 장면에 등장했다. 퀸스타운에서 글레노키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와 다트강 주변의 풍경도 여행 자체를 하나의 판타지 서사처럼 만든다.

푸껫, 해변 밖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섬
푸껫을 바다와 리조트만으로 기억한다면 섬의 절반만 본 셈이다.
북부 카오프라테오 일대에는 열대우림과 폭포, 숲길이 이어진다. 부킹닷컴은 이번 로맨타지 여행지 선정에서 푸껫의 잘 알려진 해안 대신 숲 속의 비밀 세계에 초점을 맞췄다.
열대수목 사이로 자리 잡은 키말라의 독특한 빌라 역시 이 이미지를 강화한다. 바다 전망보다 밀림과 자연을 전면에 내세우는 숙박 공간이 여행지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사례다.

우붓, 판타지가 아니라 ‘신성함’에 가까운 숲
발리 우붓은 6개 목적지 가운데 로맨스보다 신비에 가까운 곳이다.
열대우림과 계곡, 논, 사원과 전통 의식이 일상의 공간 안에 함께 존재한다. 특히 우붓 몽키 포레스트는 숲 안에 사원과 성스러운 공간이 이어져 있어 자연과 종교문화가 동시에 작동하는 장소다.
여행지는 이제 ‘장소’보다 ‘세계관’을 판다
로맨타지 여행이 흥미로운 이유는 새로운 관광지를 발굴했다는 데 있지 않다.
전주와 시라카와고, 함피, 글레노키, 푸껫, 우붓은 모두 오래전부터 유명한 관광지다. 달라진 것은 여행자가 이곳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건축은 왕국이 되고 숲은 비밀세계가 되며 오래된 골목과 영화 촬영지는 하나의 서사를 가진 여행 무대로 재해석된다.
이는 관광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관광지는 더 이상 볼거리의 숫자만으로 경쟁하기 어렵다. 여행자가 어떤 이야기를 경험하고 그 공간에서 자신을 어떤 인물로 상상할 수 있는지가 새로운 여행 상품의 가치가 되고 있다.
판타지는 허구지만 그 판타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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