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암흑으로 변하던 농촌 지자체의 밤이 바뀌고 있다. 전국 수많은 기초지자체가 야간관광이라는 명목 아래 수십억 원의 혈세를 들여 레이저 조명탑을 세우고, 국적 불명의 LED 꽃밭과 화려한 미디어파사드를 설치하며 출혈 경쟁을 벌이는 사이, 경북 성주군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화려한 하드웨어 토목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지역이 수백 년간 지켜온 역사 유적과 원시림 숲길, 그리고 로컬 미식을 채워 넣었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은 ‘전 프로그램 당일 완판’이었다.
성주군은 야간관광 특화도시 3년 차를 맞아 선보인 9월 핵심 프로그램들이 사전 접수 시작 당일 전 회차 조기 마감됐다고 밝혔다. 대구 등 인근 대도시 소비자를 겨냥한 단발성 축제가 아니라, 성주가 가진 독보적 역사·자연 인프라를 야간 보행 및 체험과 결합해 체류형 야간관광의 모범 답안을 써 내려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십억짜리 조명 쇼는 없다… ‘태실’이라는 역사적 장소성에 던진 승부수
지난 9월 12일 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 일원에는 은은한 달빛 아래 인파가 운집했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역사 강사 최태성이 진행하는 ‘별빛 역사워킹’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방문객들이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대왕의 친필이 새겨진 신도비와 함께 세종의 18명 왕자 및 원손(단종)의 태(胎)를 봉안한 전국 유일의 집단 태실 유적이다. 낮 시간대에도 학술적 가치로 이름난 이 장소에 성주군은 ‘야간 역사 산책’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방문객들은 문화관광해설사의 깊이 있는 해설과 함께 고즈넉한 태실 능선을 걸으며 조선 왕실 생명 존중 사상의 흔적을 되짚었고, 이어진 실내 역사 특강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보였다.
인위적인 조명 조형물 대신 유적지가 품은 침묵과 역사적 무게감을 콘텐츠의 전면에 내세운 기획은 주효했다. 가족 단위와 젊은 역사 애호가들이 몰려들며 접수 창구가 열리자마자 조기 마감되는 기록을 썼다. 장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야간 시간대를 활용해 인문학적 깊이를 더한 전략이 적중한 셈이다.

트레킹과 로컬 미식의 결합… 가야산의 밤을 소비재로 바꾸다
성주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핵심 축은 가야산국립공원이다. 9월 5일과 19일 진행된 ‘가야산 나이트 트레킹 & 별빛 디저트 다이닝’ 역시 접수 당일 전석이 매진됐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보행’과 ‘미식’의 정밀한 결합이다. 참가자들은 가야산의 전설이 깃든 정견모주길을 전문 가이드와 함께 걸으며 낮에는 볼 수 없던 숲의 소리와 밤공기를 체험했다. 과도한 경관 조명을 배제하고 보행자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유도등과 손전등만으로 자연 그대로의 어둠을 살렸다.
트레킹의 종착지에는 성주의 독보적 특산물인 ‘성주 참외’를 활용한 감성 디저트 다이닝이 기다렸다. 여기에 어린이들을 위한 야간 곤충 탐사 체험과 소규모 어쿠스틱 공연이 더해지면서 3040 부모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걷고 떠나는 등산로를 ‘야간 힐링 복합 소비 공간’으로 재구성해 낸 것이다.
‘군 단위 최초’ 특화도시 3년 차… 하드웨어 중독 깬 ‘트윙클 성주’
성주군은 지난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야간관광 특화도시 공모에서 전국 군(郡) 단위 지자체 중 최초로 선정되는 이변을 낳았다. 부산, 대전, 전주, 강릉 등 막강한 도시 인프라를 가진 특례시·대도시들과의 경쟁 속에서 성주군이 낙점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속 가능한 야간 콘텐츠’에 대한 명확한 철학이 있었다.
대다수 농어촌 지자체의 야간관광은 실패를 거듭해 왔다. 수억 원을 들인 루미나리에 조명 시설은 개막 첫해 반짝 흥행 후 막대한 전기요금과 유지보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흉물로 방치되기 일쑤였다. 시설에 집착하는 하드웨어 만능주의의 한계였다.
반면 성주군은 ‘트윙클 성주’라는 도시 브랜드를 내세워 3년간 철저히 소프트웨어와 운영 기획력에 집중했다. “성주에는 낮에 볼 것만 있고 밤에는 먹고 잘 곳이 없다”는 고질적인 통념을 깨기 위해, 지역의 천연기념물과 역사 유적을 야간 시간대 소비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촘촘히 엮어냈다. 대규모 토목 비용을 절감하는 대신 수준 높은 해설사 육성, 로컬 식음료(F&B) 개발, 안전 요원 배치에 투자해 관광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렸다.
10월 성밖숲으로 이어지는 대장정… ‘참크닉’과 밤밤페스타 연계
성주군은 9월의 운영 성과를 바탕으로 10월 본격적인 가을 야간관광 시즌에 돌입한다. 이번 무대는 수령 300~500년에 달하는 천연기념물 왕버들 숲, ‘성밖숲’이다.
오는 10월 9일부터는 숲속 잔디밭에서 감성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성밖숲 나이트 참크닉’이 막을 올린다. 성주 참외를 모티브로 한 피크닉 세트와 버스킹 공연이 어우러져 가을밤의 정취를 더할 예정이다.
이어 10월 10일에는 전국 10개 야간관광 특화도시가 연계하는 통합 이벤트 ‘대한민국 밤밤페스타’의 마지막 일정이 성밖숲에서 펼쳐진다. 수천 개의 LED 캔들이 성밖숲 잔디밭을 밝히는 ‘캔들라이트 콘서트’와 가을밤 야외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 ‘숲속 야외 도서관’이 동시에 운영된다. 군은 특정 축제 기간 외에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성밖숲 나이트 워킹’을 상설 운영해 한 달 내내 야간 체류 수요를 흡수한다는 구상이다.
전화식 성주군수는 “대규모 토목 시설 투자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이 가진 고유한 유산과 자연을 관광객이 오감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정밀하게 스토리텔링하는 것”이라며 “3년간 다져온 기획력을 바탕으로 다가오는 10월에도 전국 관광객들이 성주의 깊어가는 가을밤을 온전히 머물며 즐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밤의 정취를 사유하는 인문학적 여행. 조명 탑을 걷어내고 역사와 숲길의 본질에 집중한 성주군의 실험이 대한민국 지역 야간관광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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