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2,450m 다테야마 무로도(室堂) 터미널.
고원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서늘한 한기다. 10월 하순의 알펜루트 정상부는 이미 나뭇잎을 모두 떨구고 회색빛 화강암의 뼈대를 드러낸 채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현지 운영기관의 10월 20일 관측 기록이 말해주듯, 무로도와 다이칸보 등 해발 2,000m 안팎의 고지대는 이미 단풍의 시절을 끝냈다.
그러나 시선을 산 아래로 낮추면 전혀 다른 계절이 기다린다.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의 총연장은 37.2km, 노선이 오르내리는 최대 고도차는 1,975m에 이른다. 로프웨이와 케이블카, 트롤리버스 등 6가지 산악 교통수단을 번갈아 타며 고도를 낮출 때마다 창밖의 색채가 조금씩 바뀐다.
메마른 바위 능선이 물러난 자리에 노란 자작나무가 나타나고, 해발 1,454m 구로베댐과 그 아래 협곡에 이르면 비로소 붉게 물든 10월의 활엽수림이 시야를 채운다. 겨울의 문턱에서 출발해 가을의 한복판으로 걸어 내려오는 수직의 이동. 10월 하순 알펜루트 산행이 지닌 가장 뚜렷한 매력이다.
길 위에서 흘려보내던 4시간을 거두다
아무리 빼어난 산악 절경이라도 다가가는 과정이 고되면 감흥은 반감된다. 그동안 한국 여행자들에게 북알프스는 물리적 문턱이 높은 산이었다. 도쿄나 나고야, 오사카 같은 대도시 공항에 내린 뒤, 알펜루트 들머리까지 고속버스로 편도 4~5시간을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기도 전에 좁은 버스 좌석에서 체력을 소진하는 구조였다.
하나투어가 10월 말까지 집중 편성한 인천~도야마 직항 전세기는 이 소모적인 이동을 걷어냈다.
대한항공 9항차(10월 31일까지)와 신생 하이브리드 항공사인 트리니티항공 14항차(10월 29일까지) 등 모두 23항차로 구성된 직항 노선은 알펜루트 바로 아래 자리한 도야마 공항으로 곧장 내린다.
도로 위에서 흘려보내던 서너 시간의 이동 시간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여행의 여백이 들어섰다. 산악 교통수단을 갈아탈 때 시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를 필요가 없고, 구로베호의 둑길을 걷거나 전망대에서 머무는 시간도 한결 넉넉해졌다. 제한된 3박 4일 일정 안에서 여행자가 실제로 산을 마주하는 시간의 밀도를 끌어올린 셈이다.
2년 반 만에 다시 이어진 협곡의 철길
이번 가을 도야마 여정에서 가장 눈여겨볼 변화는 구로베 협곡 안쪽에 있다.
2024년 1월 발생한 노토반도 지진으로 낙석과 교량 손상을 입어 반쪽 운행에 머물렀던 ‘구로베 협곡 토로코 열차’가 지난 10월 1일, 약 2년 반 만에 복구 공사를 마치고 전 구간 운행을 재개했다. 출발역인 우나즈키(宇奈月)에서 종점 게야키다이라(欅平)까지 20.1km의 철길이 마침내 다시 하나로 이어졌다.
유리창이 없는 개방형 객차에 앉아 협곡 안으로 들어선다. 좁은 협궤 철로를 긁으며 달리는 둔탁한 쇳소리가 암벽에 부딪혀 울리고, 서늘한 계곡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고산 로프웨이가 산맥의 거대한 윤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망대라면, 토로코 열차는 깊게 패인 V자 협곡의 바닥을 따라가며 바위의 결을 코앞에서 마주하는 통로다. 에메랄드빛 강물 위로 놓인 붉은 철교를 건널 때면, 절벽 틈마다 뿌리를 내린 단풍과 깎아지른 암벽이 겹쳐지며 북알프스의 깊은 속살을 드러낸다.
산바람을 재우는 온천, 눈의 무게를 견딘 갓쇼즈쿠리
산에서의 해는 평지보다 일찍 기운다. 거친 암릉과 서늘한 협곡을 통과한 하루의 끝은 일본 북륙(호쿠리쿠) 지방 특유의 차분한 휴식으로 이어진다.
하쿠바 일대의 산악 리조트와 온천 료칸은 산행으로 굳은 몸을 풀기에 알맞다. 차가운 산바람을 맞은 뒤 정갈한 가이세키 요리로 저녁을 비우고, 김이 피어오르는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면 고산 지대의 피로가 잦아든다.
여정은 산간 마을의 삶이 배어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시라카와고(白川郷)로 이어진다. 겨울철 수 미터씩 쌓이는 폭설을 견디기 위해 지붕을 두 손 모아 합장한 듯 가파르게 올린 ‘갓쇼즈쿠리(合掌造리)’ 가옥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눈과 산에 갇혀 지내야 했던 산간 사람들의 오랜 생존 방식이 목조 지붕의 각도마다 묵직하게 남아 있다. 인근 가나자와의 옛 찻집 거리인 히가시차야가이에서는 에도시대 목조 격자창 골목을 걸으며 금박 공예와 차 문화가 남긴 고도(古都)의 정취를 만날 수 있다.
동절기 폐쇄 한 달 전, 올해의 마지막 산길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사계절 내내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
오는 11월 30일 운행을 끝으로, 이듬해 4월 중순 눈벽(설벽)을 깎아 길을 다시 열 때까지 약 다섯 달 동안 긴 동절기 통제에 들어간다. 해발 2,000m 고원이 폭설 속에 완전히 잠기기 전, 두 계절이 교차하는 북알프스를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이제 한 달 남짓 남았다.
길 위에서 버리던 시간을 아껴준 도야마 직항 전세기, 그리고 2년 반의 침묵을 깨고 협곡 끝까지 다시 달리기 시작한 토로코 열차. 겨울이 산 전체를 덮기 전, 산을 타고 내려오는 올해의 마지막 가을을 가장 가까운 경로로 마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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