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시절은 늘 짧아서 아쉽다.

9월 초순, 경북 구미시 낙동강변을 소금밭처럼 하얗게 뒤덮었던 5ha의 메밀꽃도 예외는 아니었다. 축구장 7개를 이어 붙인 너른 하천부지에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일렁이던 순백의 물결은 중순 무렵 절정을 지나며 서서히 빛을 바랬다.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지고 꽃잎이 흩날려 떨어진 자리. 사람들은 화려했던 가을 한 자락이 끝났다고 여기기 쉽지만, 낙동강변의 시간은 이제 막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미 낙동강체육공원 인근 5ha 하천부지에 조성된 메밀꽃밭
구미 낙동강체육공원 인근 하천부지에 조성된 메밀꽃밭. 전체 규모는 5ha로 축구장 약 7개를 합친 크기다. 사진=구미시

벌들에게 먼저 내어준 가을

구미시가 구미칠곡축협과 손을 잡고 이 넓은 둔치에 메밀을 파종한 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진 배경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꽃망울이 한창 터져 나오던 9월, 5ha의 들판은 인근 양봉농가의 꿀벌들에게 거대한 쉼터이자 먹이터였다. 기후변화로 꿀을 모을 꽃을 찾기 힘든 시절, 낙동강변에 피어난 메밀꽃은 꿀벌들에게 맑은 꿀을 내어주며 생명을 북돋웠다.

강변을 찾은 사람에게는 가을의 낭만이었고, 자연의 일꾼들에게는 귀한 생존의 터전이었던 셈이다. 꽃을 피워내는 일 자체가 이미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첫 번째 쓰임이었다.

구미 낙동강체육공원에서 시민들이 가을 꽃정원을 걷는 모습
낙동강체육공원의 가을 꽃정원을 찾은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사진=구미시

베어내어 사료로, 비워진 땅에는 청보리를

꽃이 시들어가면 이 땅은 서둘러 두 번째 쓰임을 준비한다.

구미시는 꽃이 진 메밀을 거두어 축산농가에 공급할 고품질 조사료로 활용한다. 그리고 메밀을 걷어낸 자리에 곧장 헤어리베치와 청보리를 다시 심는다. 겨울을 견디고 자라날 이 푸른 작물들 역시 훗날 축산농가의 든든한 사료가 된다.

물을 대는 일조차 헛된 비용을 들이지 않았다. 선산읍에서 가뭄대책용으로 쓰던 스프링클러를 그대로 가져와 밭을 적셨다.

한 계절의 눈요기로 소비되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꿀벌의 식탁에서 소의 먹이로, 다시 푸른 새싹으로 땅을 비옥하게 채워나가는 순환이다. 메밀꽃의 화려한 개화는 끝이 아니라, 이 땅이 품은 긴 쓰임의 한 과정일 뿐이었다.

푸른 산과 하늘 아래 펼쳐진 구미 낙동강변 메밀꽃밭
낙동강변에 펼쳐진 메밀꽃밭. 개화기에는 양봉농가의 밀원으로 활용되고 꽃이 진 뒤에는 조사료 생산으로 이어진다. 사진=구미시

꽃밭 너머로 이어지는 200만 시민의 일상

꽃밭의 뒤편을 돌아보면 낙동강체육공원의 묵직한 체급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제 규격의 종합경기장을 포함해 축구장만 9면, 여기에 야구장 3면과 풋살장 5면, 족구장 7면, 게이트볼장 8면이 강줄기를 따라 시원하게 뻗어 있다. 긴 자전거도로를 따라 바람을 가르는 이들의 숨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연간 200만 명이 이 강변을 찾는 까닭은 분명하다. 꽃이 필 때만 반짝 찾아왔다 떠나는 외딴 관광지가 아니라, 시민들이 날마다 땀을 흘리고 호흡을 고르는 생활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메밀꽃은 그 너른 일상의 공간 위에 잠시 얹혀진 가을의 따뜻한 선물이었다.

낙동강변에 조성된 구미 낙동강체육공원 야구장과 체육시설
낙동강체육공원에는 축구장과 야구장, 풋살장 등 다양한 생활체육시설이 강변을 따라 자리한다. 사진=구미시

10월의 낙동강변을 걷는 법

10월의 길목에서 구미를 찾는다면, 새하얗게 피어난 9월의 메밀꽃밭을 마주하기는 어렵다.

지금 낙동강변은 다음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메밀을 거두고 청보리의 싹을 틔울 흙을 다듬는 때다. 만개한 꽃을 보러 길을 나섰다면 조금은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꽃이 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는 일은 또 다른 깊이를 남긴다. 붉게 물드는 낙동강의 저녁노을을 곁에 두고 자전거 페달을 밟거나, 흙냄새를 맡으며 강바람 속을 걷는 일만으로도 가을의 품은 넉넉하다.

구미 낙동강체육공원 수변 산책로와 넓은 녹지
낙동강체육공원의 수변 녹지와 산책로. 꽃구경뿐 아니라 걷기와 자전거, 생활체육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사진=구미시

가장 화려한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땅은 쉼 없이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낸다. 올가을 구미 낙동강변에서 마주하는 진짜 풍경은 하얗게 부서지던 꽃빛 너머, 묵묵하게 계절을 이어가는 대지의 담담한 숨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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