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12km, 소요 시간 4~5시간. 등산 문외한에게 이 숫자를 내밀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산 아래는 아직 늦더위의 잔향이 맴도는 10월 초순, 울산 울주군 상북면 배내골에는 이 긴 거리를 걷겠다며 전국에서 몰려든 청춘들과 초보 등산객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행선지는 해발 900m 고원에 자리한 영남알프스의 명물, 간월재(肝月嶺)다.
거대한 바위 봉우리를 기어오르고 끝없는 수직 계단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험산이 아니다.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게 다듬어진 숲속 흙길을 산책하듯 사부작사부작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숲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눈앞으로 10만여 평에 달하는 광활한 은빛 억새의 바다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고행을 건너뛰고 비경을 품에 안겨주는 산, 간월재의 가을이 열렸다.

‘사슴농장 코스’의 비밀… 계단 없는 편도 6km 완만한 임도
간월재 억새평원에 닿는 길은 여러 갈래다. 등억온천단지 쪽에서 험한 암릉을 치고 오르는 간월공룡능선 코스도 있고, 신불산 쪽에서 묵직한 종주 산행을 잇는 길도 있다.
하지만 초보자들의 발길이 단 하나의 들머리로 쏠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배내2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는 이른바 ‘사슴농장 코스(배내골 임도 코스)’다.
이 코스의 가장 독보적인 장점은 ‘가파른 오르막과 계단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 군부대와 산림 관리용으로 닦아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걷기 때문에, 해발 400m대인 주차장에서 해발 900m인 간월재 고원까지 경사도가 거의 일정하게 완만하다. 손으로 바위를 잡거나 네발로 기어오를 구간이 단 한 곳도 없다.
다만 ‘쉽다’는 말이 ‘가깝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편도 6km, 왕복 12km에 달하는 긴 거리다. 산행 안내판에는 편도 1시간 30분, 왕복 3시간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는 쉬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 숙련자의 속도다.
억새평원에 닿아 사진을 찍고, 나무 데크에 앉아 바람을 쐬고, 간월재휴게소에서 요기를 하며 머무는 시간을 감안하면 넉넉하게 4시간 30분에서 5시간은 잡아야 제대로 된 가을 여행이 완성된다.

숲의 터널이 끝나는 순간, 파도처럼 쏟아지는 10만 평 은빛 평원
사슴농장 코스는 초반 1시간 안팎 동안 도토리나무와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룬 고즈넉한 숲길을 통과한다. 발밑으로 자갈과 흙이 자박자박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평이한 풍경에 다소 지루해질 무렵, 길목 끝자락에서 바람의 온도가 서늘하게 바뀐다.
그리고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시야가 천지개벽하듯 활짝 열린다.
간월산(1,069m)과 신불산(1,159m)이라는 두 거대한 영남알프스의 거봉 사이에 푹 파인 너른 안부. 그곳에 축구장 수십 개를 합쳐놓은 듯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 군락이 시야를 빈틈없이 채운다.
동해와 남해에서 불어온 거센 골바람이 고원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수억 개의 억새 이삭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누우며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인다. 좁은 산꼭대기에 억지로 발을 딛는 정상 정복형 산행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압도적인 해방감이다.

10월 초 은빛에서 11월 황금빛으로… 역광이 만드는 최고의 순간
억새의 표정은 날마다, 시간마다 달라진다.
9월까지 푸른 잎이 남아 있던 ‘청억새’는 10월 초순을 지나며 솜털을 터뜨려 눈부신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찬 서리가 내리는 10월 하순부터 11월로 접어들면 억새는 묵직하고 따스한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는다.
간월재에서 가장 극적인 풍경을 마주하고 싶다면 늦은 오후의 빛을 노려야 한다. 서쪽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3~4시 무렵, 능선 너머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억새 이삭 뒤편을 때리는 역광의 순간이다.
빛을 머금은 억새밭 전체가 은빛 백열등을 켠 것처럼 눈부시게 타오르고, 그 사이로 조성된 목재 데크길을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겹쳐진다.

해발 900m서 먹는 컵라면의 맛… 배내골에 깃든 역사의 숨결
바람 부는 억새평원 한가운데 자리한 ‘간월재휴게소’는 등산객들에게 또 하나의 목적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문을 여는 이곳에서 사 먹는 따끈한 컵라면 한 사발은 찬 바람에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최고의 만찬이다. 평소엔 흔하디흔한 인스턴트 라면이지만, 해발 900m 바람 부는 억새밭 벤치에 앉아 영남알프스 능선을 바라보며 들이켜는 국물 맛은 그 어떤 산해진미와도 비교할 수 없다.
단, 가을 성수기 주말에는 컵라면을 사기 위해 수십 미터씩 줄이 늘어서고 조기 품절되기도 하므로, 따뜻한 보온병에 물과 간식을 따로 챙겨가는 편이 안전하다.
풍경에 취해 잊기 쉽지만, 간월재는 역사의 아픔과 민초들의 땀방울이 서린 고개이기도 하다.
옛날 배내골 주민들이 언양 장터로 숯과 농산물을 내다 팔기 위해 지게를 지고 넘나들던 보부상의 길이었고,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절에는 신자들이 관군의 눈을 피해 험준한 산속으로 숨어들어 신앙을 지켜내던 피난처였다. 간월산 자락 왕방골에 지금도 남아 있는 천주교 사적지 ‘죽림굴’이 그 치열했던 역사를 증언한다.
‘안전한 억새 산행’을 위한 필수 수칙
비록 계단 없는 임도라 해도 12km는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자갈과 굵은 흙이 섞인 길을 왕복 4~5시간 걷다 보면 발바닥과 무릎에 피로가 차곡차곡 쌓인다. 바닥이 얇은 패션 운동화나 슬리퍼 차림으로 나섰다가는 하산길에 미끄러져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반드시 밑창이 단단하고 접지력이 좋은 트레킹화나 등산화를 착용해야 한다.
또한 고원지대 특성상 산 아래보다 기온이 5도 이상 낮고 바람이 매우 거세다. 땀을 흘린 상태에서 고원에 올라서면 체온이 순식간에 떨어지므로 체온을 유지해 줄 윈드브레이커와 얇은 장갑은 필수 준비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차 전쟁이다. 배내2공영주차장은 무료로 운영되지만, 10월 주말이면 오전 7시 이전에 이미 만차가 된다. 늦게 도착할 경우 한참 아래쪽에 위치한 배내1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참을 더 걸어 올라와야 한다. 이른 새벽 서둘러 출발하거나, 비교적 여유로운 평일 일정을 잡는 것이 현명하다.
간월재의 가을은 발걸음을 서두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긴 자갈길일 뿐이지만,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걷는 사람에게는 온몸으로 가을의 깊이를 들이마시는 축복이 된다.
가장 편안한 걸음으로 가장 웅장한 대자연을 만나는 길. 올가을 은빛 파도가 넘실대는 영남알프스의 바람 속으로 걸어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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