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신문=부여 이만재 기자] 어떤 집은 그곳으로 걸어 올라가는 발걸음부터 이미 다정한 여행이 된다.
백마강 물줄기를 곁에 둔 부여 규암면의 호젓한 골목길. 세월의 때가 곱게 내려앉은 나지막한 슬레이트 지붕들과 돌담을 벗 삼아, 숨이 조금 찰 무렵까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 가지를 지나고 언덕마루에 다다르면, 거짓말처럼 맑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단아하게 앉아 있는 집 한 채가 길손을 멈춰 세운다.
수북로1945.
짙은 먹빛의 기와지붕 아래 말끔하게 칠해진 하얀 벽체, 그리고 초록빛 풀밭 위에 징검다리처럼 박힌 둥근 디딤돌 마당이 가장 먼저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하얀 판자벽 위로 다소곳이 새겨진 붉은 글씨 ‘Love’와 처마를 따라 줄지어 매달린 동글동글한 알전구들이 오가는 바람 속에 살랑이며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요즘 관광지에 흔한 거대하고 차가운 통유리 카페의 위압감은 찾아볼 수 없다. 81년이라는 긴 세월을 가만히 품어 안은 채, 언덕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품새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외갓집처럼 포근하다.

상량목에 남겨진 ‘1945년 9월’… 시간을 건너온 하얀 집
이 작은 집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81년 전 어느 벅찬 가을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울어가던 낡은 농가를 헐지 않고 조심스레 매만지던 날, 집의 뼈대를 떠받치고 있던 육중한 대들보 위에서 오랜 먼지를 털어낸 글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1945년 9월’.
일제강점기 끝자락에 일본인이 짓기 시작했던 뼈대를, 해방의 격변 속에서 한 한국인이 건네받아 비로소 완성해 냈던 역사의 흔적이었다. 나라가 주인을 되찾고 온 산하가 요동치던 그해 가을, 규암의 소박한 언덕 위에서도 누군가는 새 시대를 향한 간절한 희망을 담아 대들보에 먹글씨를 새겼다. 그 이름 모를 목수의 온기가 시간을 건너 오늘날 ‘수북로1945’라는 어여쁜 이름으로 다시 피어난 것이다.
격동의 시대를 버텨낸 뼈대 위에 하얀 회벽을 덧바르고, 햇살이 잘 들도록 나무 창호를 손질해 놓으니, 집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따스한 쉼터로 다시 숨을 쉰다.

창가 나무 벤치와 빨간 머리 앤… 스물여덟 자리의 온기
정원으로 발길을 돌리면 풍경은 한층 더 사랑스러워진다.
풀밭 위에 총총히 놓인 둥근 디딤돌을 밟으며 걷다 보면, 활짝 열린 목재 격자 창문 아래 다소곳이 놓인 소박한 나무 벤치 하나와 마주친다. 벤치 한구석에는 양갈래 머리를 땋고 무릎을 모은 채 턱을 괸 빨간 머리 앤이 가을 볕을 쬐며 앉아 있다. 그 무구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발걸음은 절로 멈추고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간다.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선 실내 역시 아담하고 정겹다. 넓은 홀 대신 꼭 스물여덟 자리만이 올망졸망 품을 내어준다.
손때 묻은 나무 식탁과 의자, 벽면을 장식한 단정한 쪽빛 천 조각과 소박한 꽃 그림들이 작은 방을 포근하게 채운다. 테이블마다 마주 앉은 사람들의 두런두런 오가는 낮은 이야기와 웃음소리, 그리고 갓 쪄낸 음식의 구수한 내음이 실내를 채우며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살림집’의 온기를 완성한다.

연잎을 펼치자 쏟아지는 가을… 흑미와 단호박의 향연
이곳 식탁의 백미는 단연 정성으로 쪄낸 연잎밥이다.
큼직하고 짙은 초록의 연잎 매듭을 조심스레 풀면, 풋풋하고 그윽한 풀향이 뽀얀 김과 함께 훅 끼쳐와 코끝을 간질인다. 잎사귀 안쪽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차진 밥이 눈부시게 들어앉아 있다. 붉은 흑미와 샛노란 차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그 한가운데 포슬포슬하게 익은 노란 단호박과 밤, 검은콩이 탐스럽게 얹혀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연잎은 맑은 바람이 부는 전북 부안에서 정성껏 들여오고, 상에 오르는 찬거리들은 언덕 아래 텃밭에서 아침이슬을 머금고 자란 채소들로 정갈하게 무쳐냈다.
탱글탱글하게 썰어낸 도토리묵, 맑고 시원하게 끓여낸 미역국, 껍질을 벗겨 새콤달콤하게 절여낸 방울토마토 절임과 파릇한 겉절이까지. 과한 양념이나 조미료 대신 땅의 정직함으로 버무려내 한 술 뜰 때마다 입안 가득 맑고 개운한 자연의 맛이 맴돈다.

언덕을 내려가며 마음에 남는 것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서면, 규암마을의 정겨운 지붕들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의 물줄기가 시야에 가득 찬다.
올라올 때는 제법 숨이 가빴던 언덕길이, 내려갈 때는 풍경을 가장 따뜻하고 아늑한 높이에서 바라보게 해 준 고마운 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부여에 오면 누구나 사비 백제의 찬란했던 궁궐 터와 거대한 산성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때로는 언덕 끝 작은 집, 81년 묵은 대들보 아래서 맛본 연잎밥 한 상과 창가 벤치에 머물던 가을바람 한 줄기가 여행자의 가슴에 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1945년 9월의 기억과 2026년 가을의 볕이 다정하게 어깨를 맞댄 곳.

수북로1945를 나서는 길, 등 뒤로 남겨진 짙은 처마 끝 알전구 위에는 여전히 맑은 가을 햇살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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