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신문=부여 이만재 기자] 아스팔트는커녕 리어카 바퀴조차 굴러가지 않던 험한 시절이었다.
산짐승 우는 맹수령 고개를 넘고, 비포장 황톳길을 가르며 장에서 장으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걷던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이 등짝에 짊어진 건 피륙과 놋그릇만이 아니었다. 아랫마을 흉년 소식과 윗마을 혼인 잔치, 한양 조정의 흉흉한 민심까지 죄다 그들의 땀에 젖은 등판을 타고 팔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그들을 장돌뱅이, 점잖게는 보부상(褓負商)이라 불렀다.
그런데 가만히 짚어보면 기이한 구석이 있다.
그토록 팔도강산을 들었다 놨다 하던 그 많던 보부상들은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을까.
충남 부여군 홍산면, 고색창연한 관아와 흙돌담 사이를 서성이게 된 건 순전히 그 뜬금없고도 묵직한 물음표 하나 때문이었다.

보자기 든 놈과 지게 진 놈… 엄연히 ‘체급’이 달랐다
우리는 흔히 뭉뚱그려 ‘보부상’이라 부르지만, 그 바닥의 생리를 들여다보면 족보부터가 판이했다.
‘보(褓)’는 보자기에 싸서 품에 안고 다니던 보상(褓商), 즉 ‘봇짐장수’다. 은비녀, 가락지, 노리개, 분통, 먹과 붓처럼 손바닥만 해도 쌀 몇 가마 값을 호가하는 알짜배기 고가품을 취급했다. 걸음걸이도 비교적 가벼웠고 주머니도 두둑했다.
반면 ‘부(負)’는 등짝에 지게를 얹은 부상(負商), 이름 그대로 ‘등짐장수’다. 소금 자루, 옹기독, 무쇠솥, 미역단처럼 부피 크고 허리가 끊어질 듯 무거운 생필품을 날랐다. 진흙탕에 빠지고 비바람을 맞으며 온몸의 뼈마디로 밥벌이를 하던 이들이다.
홍산의 유물 전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이 둘의 ‘체급 차이’가 확연히 다가온다.
등짐장수들이 험난한 산길에서 지게를 받쳐 세우고, 덤벼드는 늑대나 도적놈을 찌르기 위해 끝에 날카로운 쇠칼을 박아 넣은 지게막대기 ‘촉작대(鏃作대)’. 그리고 목에 걸고 다니며 “나 나라가 공인한 장사꾼이오”를 증명하던 묵직한 신패(신표).
이들은 푼돈이나 바라고 길바닥을 떠돌던 무지렁이들이 아니었다. 관청의 도장을 등에 업고, 뼈를 깎는 자체 규율로 똘똘 뭉친 무서운 상인 집단이었다.

충청도 팔도를 쥐락펴락한 모시 카르텔, ‘저산팔읍상무사’
이곳 홍산이 보부상 역사에서 독보적인 성지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저산팔읍상무사(苧産八邑商務社)’의 본산이기 때문이다.
‘저산(苧産)’이란 모시가 나는 땅을 뜻한다. 조선 후기 홍산, 임천, 부여, 서천, 한산, 비인, 남포, 정산 등 충청 서남부 여덟 고을은 삼베와 모시로 조선 팔도를 먹여 살리던 금싸라기 땅이었다. 이 막대한 이권을 외지 상인과 장마당 잡배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8개 고을 장꾼들이 피로 맺은 연합체가 바로 상무사였다.
조직도 칼 같았다. 봇짐장수(보상)는 우사(右社)로 뭉치고, 등짐장수(부상)는 좌사(左社)로 편을 갈라 철저하게 역할을 나눴다.
전시관 벽면에 펄럭이는 ‘苧産八邑商務社’ 대형 깃발 아래 서면, 그 옛날 장마당을 호령하던 이들의 서슬 퍼런 기세가 느껴진다. 남포와 비인의 짠 바닷바람에서 건져 올린 건어물과 소금이 홍산과 한산의 비단결 같은 모시와 뒤섞이고, 다시 내륙의 쌀과 뒤바뀌며 돌던 그 거대한 순환로.
오늘날이야 내비게이션 찍고 에어컨 틀며 1시간이면 주파할 거리지만, 그 시절엔 누군가 장딴지에 알이 배기도록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야 했던 피땀의 길이었다.

“어이쿠, 허리 끊어지겠네”… 체험이 되어버린 생계의 무게
전시관 한편에 놓인 집채만 한 등짐 모형을 관람객 하나가 끙끙거리며 짊어져 본다.
“어이쿠, 이걸 지고 고개를 어떻게 넘었대?”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처자식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짊어졌을 천근만근의 삶의 무게가, 오늘날엔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 한 번 누르고 마는 주말 나들이 ‘인증샷 체험’으로 내려앉았다.
세월이 참 무심하고도 빠르다.
그렇다면 그악스럽게 질기던 그 많던 보부상들은 도대체 언제 다 사라졌을까.
어느 날 갑자기 국가에서 “오늘부터 장사 끝!” 하고 호루라기를 분 게 아니다. 일제가 군용 물자를 실어 나르겠다고 산허리를 깎아 신작로를 내고 시커먼 기차를 놓았을 때, 도시에 번쩍거리는 상설 점포가 들어서고 기름 냄새 풍기는 화물 트럭이 흙길을 점령했을 때, 사람의 두 다리는 속도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문명의 속도에 밀려난 장사꾼들은 짐을 덜어내듯 소리 없이 하나둘 장터를 떠났다.
그래서 역사책 어디를 뒤져봐도 보부상이 사라진 ‘마지막 날’ 같은 건 적혀 있지 않다. 저녁노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산모퉁이를 돌아 나가듯, 그렇게 우리 곁에서 스르르 지워져 버린 것이다.

길은 그대로인데… 홍산동헌 돌담을 쓸어내리며
전시관 문을 밀고 나와 홍산동헌(鴻山東軒) 마당에 선다.
위풍당당한 동헌 건물과 그 곁을 호젓하게 감싸 안은 돌담길 위로 가을볕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사또가 호통을 치던 관아 문턱 너머로, 지게를 내려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 한 바가지 들이켰을 보부상들의 환영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새벽 배송 박스가 문 앞까지 날아오는 오늘이다.
부여 홍산의 옛 관아 길에서 만난 보부상의 자취는 그래서 더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만든다. 오늘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이 풍요로운 물류와 유통의 바탕에는, 짚신 바닥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팔도를 누비며 길을 열었던 옛 장돌뱅이들의 뼈아픈 걸음마가 묻혀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조직의 깃발과 거친 길은 오롯이 남았다.
홍산에서 걷는 이 길은 박제된 유적지 답사가 아니다. 인간의 두 어깨와 두 다리뼈가 곧 나라의 길이자 산업의 전부였던, 그 치열했던 조선의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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