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찰칵’거리는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 소리와 화려한 한복 차림의 포즈로 소란스럽던 고궁의 오후가 문득 깊은 침묵 속으로 내려앉았다.
가을볕이 비스듬히 내리쬔 창경궁 명정전 뒤뜰. 목에 헤드폰을 걸치고 고성능 마이크를 쥔 푸른 눈과 갈색 머리의 외국인들이 발걸음을 까치발로 죽였다. 숨소리마저 잦아든 숲 사이로, 나뭇잎을 스치며 처마 단청을 감아 도는 솔바람 소리와 박석(薄石)을 사뿐히 딛는 흙먼지 묻은 발자국 소리가 헤드폰 너머 귓전을 간질였다.
풍경을 ‘찍어 담던’ 여행자들이 궁궐의 숨결을 ‘귀로 채집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서울 창경궁과 북촌 한옥 휘겸재에서 펼쳐낸 ‘코리아 사운드 저니(Korea Sound Journey)’. 미국, 중국, 일본, 태국, 유럽 등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찾아온 100여 명의 글로벌 여행자와 인플루언서들이 참여한 이 여정은 한국 관광의 패러다임이 어디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준 실험대였다.

2,300대 1 뚫고 날아온 이들… 영상 속 소리가 진짜 현실이 되다
이번 여정의 시작은 지난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관광공사는 지난 7월, 2년 연속 한국관광 명예홍보대사로 활약 중인 배우 박보검이 덴마크 뮤지션과 함께 한국의 골목과 자연을 누비며 일상의 소리를 찾아가는 해외 홍보영상 ‘Begin to Hear Korea’를 공개했다. 눈부신 랜드마크를 나열하던 종전의 문법을 깨고, 자갈치 시장의 활기찬 외침, 다도해의 파도, 고즈넉한 한옥 처마의 빗소리 같은 ‘청각적 질감’에 초점을 맞춘 영상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국관광공사 유튜브 채널(VISITKOREA)에서 소리만 듣고 한국의 명소를 맞히는 ‘사운드 퀴즈’에 전 세계 2,300여 명의 글로벌 팬들이 몰렸다. 그리고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최종 주인공들이 마침내 서울 창경궁에 집결한 것이다. 랜선 너머로 듣던 미지의 소리를 자신의 두 귀와 발걸음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8개 조로 흩어진 ‘사운드워커’… 처마 끝 바람에서 서울의 숨결을 낚다
1부 ‘사운드 워킹(Sound Walking)’에서 참가자들은 전문 사운드 아티스트들의 안내를 받으며 8개 조로 나뉘어 궁궐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참가자들의 손에는 스마트폰 대신 지향성 마이크가 들렸다. 시각을 잠시 내려놓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공간의 무늬가 귀를 통해 선명하게 살아났다. 춘당지 연못가에 내려앉는 산새들의 날갯짓, 명정전 회랑을 지날 때 울리는 낮고 묵직한 공명, 심지어 담장 너머 율곡로에서 아스라이 섞여 들어오는 서울 도심의 자동차 배기음까지도 궁궐의 600년 역사와 어우러져 한 편의 독특한 현대 음악처럼 직조됐다.
미국에서 온 한 참가자는 “항상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바빴는데, 눈을 감고 헤드폰을 끼니 창경궁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유기체처럼 느껴졌다”며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가 이토록 한국적인 감성을 품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고 벅찬 소감을 털어놓았다.
북촌 휘겸재의 다정한 오후… 박보검과 마주 앉아 나눈 ‘소리의 기억’
궁궐에서 소리 사냥을 마친 이들은 인근 가회동 한옥 ‘휘겸재’로 자리를 옮겼다.
단정한 마당과 대청마루가 어우러진 이곳에서 열린 2부 ‘사운드 토크 앤 셰어(Sound Talk & Share)’의 문이 열리자, 한국관광 명예홍보대사인 배우 박보검이 따뜻한 미소로 이들을 맞았다.
한류 톱스타와 글로벌 팬들의 만남이었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화려한 연예계 뒷이야기가 아니었다. 조금 전 창경궁에서 각자 채집해 온 날것의 소리 파일들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참가자들이 녹음한 바람 소리, 낙엽 밟는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박보검과 참가자들은 그 소리가 궁궐의 어느 모퉁이에서 건져 올린 것인지 맞히며 국경과 언어를 넘어선 공감을 나눴다.
박보검은 홍보영상 촬영 당시 자신이 느꼈던 한국의 숨은 소리들을 전하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소리야말로 한국을 가장 깊이 있게 기억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언어”라고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인증샷’의 시대를 넘어… 여행자의 감각을 파고드는 K-관광
‘코리아 사운드 저니’가 남긴 울림은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 관광은 ‘어디서 사진을 찍고 무엇을 쇼핑할 것인가’라는 1차원적 시각 소비에 매몰돼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 여행자들의 눈높이는 이미 달라졌다. 유명 랜드마크를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도장 깨기식 관광’은 더 이상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창경궁의 바람 소리, 광장시장의 빈대떡 부치는 지글거림, 골목길 세탁소의 다림질 스팀 소리, 동해안 몽돌해변의 자갈 구르는 소리. 한국인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무심코 지나쳐온 일상의 소리가, 이방인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을 영혼의 울림이 될 수 있음을 이번 행사는 증명해 보였다.
카메라 렌즈의 프레임을 벗어나 여행자의 귓바퀴를 통해 가슴으로 스며든 창경궁의 가을. 한국 관광이 한류 스타의 얼굴을 비추던 시대를 지나, 여행자의 오감과 내밀한 기억을 빚어내는 진정한 ‘문화의 여정’으로 성큼 발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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