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대륙의 지도를 바꾸는 글로벌 ‘메가 투어리즘(Mega Tourism)’의 강력한 기폭제로 부상하고 있다.

유명 가수의 2시간짜리 단독 콘서트를 소비하고 돌아가는 단발성 여행을 넘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축제의 무대가 되고 국가와 대륙의 문화적 정체성이 격돌하는 초대형 음악 경연이 대규모 체류형 원정 여행을 창출하는 시대가 열렸다.

유럽 대륙에서 무려 70년간 문화적 결속과 대중음악 혁신의 산실 역할을 해온 전설적인 경연 브랜드 ‘유로비전(Eurovision)’이 사상 처음으로 범아시아 무대로 외연을 확장했다. 오는 11월 1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사상 첫 ‘유로비전 아시아 그랜드 파이널(Eurovision Asia Grand Final)’을 앞두고, 개최지 방콕은 물론 결선 참가국 전역의 인·아웃바운드 여행 시장이 거센 지각변동을 맞이하고 있다.

방콕 숙박 14% 급증… 아시아를 뒤흔든 ‘유로비전 이펙트’

글로벌 디지털 여행 플랫폼 아고다(Agoda)의 데이터에 따르면, 그랜드 파이널 주간(11월 9~22일) 방콕의 숙박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14%나 급증했다. 아시아 11개 시장의 정상급 아티스트들이 격돌하는 초대형 무대를 직접 눈에 담기 위해 전 세계 음악 팬들이 방콕으로 집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방콕행 수요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주요 시장 중 6위를 기록하며 높은 문화적 관여도를 나타냈다. 개최국 태국과 일본,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이 상위 5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에 이어 말레이시아, 홍콩, 베트남, 인도가 뒤를 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대형 음악 이벤트가 촉발하는 ‘상호 교차 방문’의 파급력이다. 지난 9월 한국 대표 선발전인 ‘코리아스 넥스트 웨이브(Korea’s Next Wave)’가 방영된 직후, 아시아 전역에서 한국을 목적지로 삼은 여행 검색량 역시 전년 대비 18% 동반 급증했다. 개별 아티스트의 팬덤을 넘어, 대륙 차원의 문화 축제가 참가국 전체의 관광 생태계를 자극하는 메가 이벤트 특유의 승수 효과(Multiplier Effect)가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페스티벌 경제학’… 목초지를 순례지로 만든 유럽의 노하우

해외 관광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음악을 도시 재생과 국가 관광 브랜딩의 핵심 동력으로 활용해 왔다. 영국의 소도시 서머싯의 한적한 농가에서 열리는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이 대표적이다. 축제 기간 20만 명이 넘는 전 세계 음악 팬이 몰려들며 진흙탕 목초지는 단숨에 글로벌 문화 순례지로 탈바꿈하고, 매년 수천억 원 규모의 지역 경제 파급 효과를 창출한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역시 도시 전체를 모차르트와 클래식 음악의 성지로 구축하며 사계절 내내 글로벌 고부가가치 문화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의 기민한 행보가 돋보인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 주도로 테일러 스위프트 등 글로벌 메가 팝스타의 단독 독점 순회공연을 유치하며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했고, 이를 통해 동남아 전역의 고소득 관광객을 흡수해 호텔, 항공, 요식업 전반에서 천문학적인 ‘스위프트노믹스’ 특수를 누렸다.

방콕 역시 이러한 전략적 궤를 같이한다. 이번 대회를 유치하며 현대적 마천루와 럭셔리 관광 인프라가 집중된 사톤(Sathorn)부터 유서 깊은 왕궁과 운하가 흐르는 올드타운(Old Town), 쇼핑 중심지 시암(Siam)과 나이트라이프의 거점 통로·에까마이까지 도시 공간 전체를 다층적인 문화 페스티벌 존으로 설계했다.

K-팝 종주국의 뼈아픈 역설… 인프라 부재와 단발성 기획의 한계

이러한 글로벌 메가 투어리즘의 폭발적 성장은 K-팝 종주국을 자처하는 한국 관광 산업에 뼈아픈 화두를 던진다.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아티스트 IP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정작 이를 체류형 메가 투어리즘으로 연결하는 국가적·제도적 역량은 여전히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질적인 대형 전문 공연장(아레나)의 절대적 부족이 글로벌 투어 유치의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5만 명 이상을 안정적으로 수용할 전문 돔 공연장이 없어 해외 팝스타들의 아시아 투어 경로에서 한국이 패싱당하거나, 잠실 주경기장 리모델링 등으로 대관 대란을 겪는 일이 다반사다.

지자체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지역 축제 역시 천편일률적인 트로트 가수 초청이나 단발성 행사 위주로 채워져, 해외 관광객의 지갑을 열 만한 독창적인 ‘테마 여행’의 흡입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이 언어 장벽 없이 티켓을 예매하고 공항에서 숙소, 공연장까지 유기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합 MICE-관광 연계 시스템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

단발성 티켓팅을 넘어 ‘체류형 음악 도시’로 도약해야

방콕의 유로비전 아시아 유치와 이에 따른 관광 수요 폭발은, 음악이 단순한 관람을 넘어 도시의 공간을 소비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됨을 웅변한다.

한국 관광이 진정한 질적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K-팝의 글로벌 인기에 안주하는 수동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세계적인 음악 축제를 기획·유치할 수 있는 메가 아레나 인프라의 확충, 지자체 고유의 인문·지리적 자산과 결합한 독창적 음악 페스티벌의 육성, 그리고 축제와 연계된 스마트 모빌리티 및 숙박 패키지 구축이 시급하다.

국경을 허문 음악의 선율이 11월 방콕의 밤하늘을 수놓듯, 한국 역시 세계인을 불러 모으는 ‘글로벌 음악 순례지’로서의 거대한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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