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일본 남단 미야자키는 온화한 겨울 골프장과 다카치호 협곡의 절경으로 익숙한 관광지다. 그러나 이곳을 단순한 여행 안내서가 아닌 2천 년 고대사의 지도로 펼치는 순간, 일본 왕실이 가장 감추고 싶어 하면서도 사서에 집요하게 새겨둔 거대한 역사적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일본 고대 국가의 정치적 심장부는 오사카와 나라분지, 즉 야마토(大和) 평야에서 태동했다. 그런데 서기 712년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못 박은 왕실의 출발점은 야마토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신의 손자가 내려왔다는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무대도, 그 후손인 초대 진무(神武) 천황이 동쪽으로 정벌을 떠난 출발지도 모두 본토와 아득히 떨어진 남규슈의 거친 산악 지대, 바로 미야자키였다.
정치권력이 자라난 땅과 왕실이 자신의 뿌리라고 지목한 땅이 왜 이토록 극단적으로 갈라지는가. 이 거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현대의 인위적인 국경선을 지우고, 2천 년 전 벼농사와 붉은 철(鐵), 그리고 망국의 유민들이 건넜던 거친 바닷길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바다는 장벽이 아니라 고속도로였다: 쌀과 철의 루트
한반도 남해안과 북부 규슈 사이에는 쓰시마(대마도)와 이키섬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맑은 날 부산 해안에서 쓰시마의 산등성이가 육안으로 선명히 잡히듯, 고대인들에게 이 현해탄은 건너지 못할 절벽이 아니라 사람과 문명을 실어 나르던 해상 실크로드였다.
일본열도의 수전농경(논농사)이 시작된 야요이시대의 유적은 북부 규슈에서 가장 먼저 폭발한다.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벼농사 기술과 토기, 그리고 논에 물을 대는 관개 토목 기술을 쥔 집단이 바다를 건넜다. 쌀이 잉여 생산물을 낳고 사회적 계급을 형성할 무렵, 그 뒤를 이어 바다를 붉게 물들인 것은 바로 ‘철’이었다.
김해 대성동과 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가득 채운 철정(덩이쇠)과 판갑옷, 마구류는 가야가 한반도 내부에 갇힌 소국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당시 일본열도에서 철은 단순한 농기구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였고, 강력한 무기였다. 질 좋은 철을 확보하기 위해 왜의 지배 세력은 목숨을 걸고 한반도 남부와 손을 잡아야 했다.
김해 구지봉에서 하늘로부터 금빛 상자가 내려와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가야의 난생신화와, 미야자키 다카치호 봉우리로 천손 니니기가 붉은 햇살을 받으며 내려왔다는 천손강림 신화는 놀라울 정도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사람과 쇠, 농경이 바다를 건너며 통치자의 정당성을 부여하던 신화의 문법까지 고스란히 열도로 복제되어 건너간 것이다.

백강의 불바다, 그리고 ‘왜’에서 ‘일본’으로의 탈바꿈
가야의 쇠퇴 이후 바닷길의 주도권을 쥔 것은 백제였다. 왕족과 사신, 오경박사와 승려, 건축 장인들이 줄을 이어 열도로 건너갔다.
660년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되자, 왜 조정이 자국의 존망을 걸고 2만 7천 명의 대군과 400여 척의 함선을 한반도 백강(금강 하구)으로 파병한 것은 단순한 외교적 의리가 아니었다. 백제의 멸망은 곧 왜 지배층 자신의 뿌리와 선진 문명 공급선이 끊어지는 국가적 존립의 위기였다.
663년 백강구 전투의 참패는 열도를 거대한 공포로 몰아넣었다.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규슈 다자이후와 세토나이카이 연안에 거대한 조선식 산성을 쌓아 올린 주역은 바로 바다를 건너온 백제의 망명 귀족과 기술자들이었다.
이 참절한 패전의 위기 속에서 열도는 비로소 미개한 연맹체였던 ‘왜(倭)’의 허물을 벗어던졌다. 율령을 반포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와 ‘천황(天皇)’이라는 최고 군주호를 공식 선포했다.
그리고 8세기 초, 새롭게 탄생한 단일 제국의 정통성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 편찬한 관찬 역사서가 바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였다. 흥미롭게도 『일본서기』의 문장을 직조한 핵심 사료는 백제 유민들이 간직해 온 역사 기록, 이른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로 통칭되는 ‘백제삼서(百濟三書)’였다. 일본의 정사는 백제의 붓과 기억을 빌려 완성된 것이다.

신화의 땅 미야자키 산골, 백제 왕족이 살아 숨 쉬는 미사토
그렇다면 왜 8세기 일본 지배층은 국가의 출발점을 야마토가 아닌 남규슈 미야자키로 끌고 내려갔을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오늘날 미야자키현 산간 오지 마을인 미사토초(美郷町)에 오롯이 남아 있다.
이 깊은 두메산골의 신몬신사(神門神社)는 놀랍게도 660년 나라를 잃고 바다를 건너온 백제의 마지막 왕족, ‘정가왕(禎嘉王)’을 주신으로 모신다. 여기서 90km 떨어진 기조초의 히키신사에는 그의 맏아들 복지왕이 배향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한겨울, 천 년을 이어온 기괴하고도 눈물겨운 축제가 열린다. 바로 ‘시와스마쓰리(師走祭り)’다. 신라계 추격군을 피해 험준한 산맥을 사이에 두고 생이별해야 했던 백제 정가왕과 복지왕 부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아들의 신여(가마)를 메고 90km의 산길을 밤낮으로 달려 아버지의 신사로 찾아가 2박 3일간 회포를 풀게 하는 제례다. 신사 인근에는 나라의 정창원을 그대로 본떠 지은 ‘서쪽의 정창원’이 서 있고, 백제 왕실의 유물과 청동거울이 침묵 속에 빛나고 있다.
일본 천황가의 천손강림 신화가 서려 있는 다카치호와 기리시마의 지척에서, 망국 백제 왕족의 피눈물 나는 유민사가 천년의 제사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남규슈는 단순한 변방이 아니었다. 거친 바다를 뚫고 들어온 대륙과 반도의 도래인들이 원주민들과 격돌하고 융합하며 열도 개척의 첫 기틀을 닦았던 거대한 생명력의 전진기지였다.


국경이라는 안경을 벗고 바라보는 2천 년의 길
김해 고분의 새벽안개 속에서 긴 쇠창을 벼리던 가야의 대장장이, 망국의 잿더미를 뒤로하고 규슈의 산골짜기에서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백제의 유민, 그리고 다카치호의 험준한 암벽을 오르며 천손의 도래를 노래하던 고대 야요이의 사제들.
그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좁게 긋고 있는 현대의 국경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더 나은 삶과 새로운 터전을 찾아 거친 현해탄 파도를 넘나들었던 거대한 인간 군상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다.
미야자키의 푸른 삼나무 숲과 협곡에 새겨진 신화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이 여정은, 잃어버린 일본 왕실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인 동시에 우리 조상들이 열도라는 거대한 도화지 위에 새겨 넣었던 웅혼한 문명의 숨결을 되찾는 사색의 순례길이다.
미야자키 한일 고대사 인문학 답사권역
일본 왕실의 천손강림 신화가 서려 있는 다카치호 협곡부터 660년 백제 멸망 후 왕족 정가왕이 정착한 산간 오지 미사토초 신몬신사까지, 2천 년 한일 해상 교류와 유민사의 궤적을 잇는 남규슈 핵심 역사 순례 코스.
여행레저신문 Copyrights ⓒ The Travel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