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신문=김미래 기자] 비행기 조종실(Flight Deck)에서 오른쪽 부기장석과 왼쪽 기장석 사이의 거리는 불과 1미터 남짓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이 좁은 틈을 건너 어깨에 네 번째 금빛 줄무늬 견장을 얹기까지, 두 여성 조종사는 꼬박 15년이라는 세월을 담금질해야 했다.
세계 최대의 장거리 항공사 중 하나인 에미레이트항공에서 마침내 자국(UAE) 출신 최초의 여성 기장 두 명이 동시에 탄생했다. 보잉 777 기종의 조종간을 잡은 하난 모하메드 자와드(Hanan Mohammed Jawad)와 바키타 알 므헤이리(Bakhita Al Mheiri) 기장이 그 주인공이다.
보수적인 아랍 사회의 시선과 두터운 항공업계의 유리천장을 뚫고, 3만 5천 피트 상공의 최종 책임자로 우뚝 선 이들의 비행 여정은 단순한 승진 그 이상의 울림을 던진다.
1미터의 이동, 300명의 목숨을 짊어진 무게
조종실의 ‘레프트 시트(Left Seat, 왼쪽 좌석)’는 항공기 지휘관인 기장만의 자리다.
오른쪽 좌석의 부기장이 조종을 보조하고 시스템을 모니터링한다면, 왼쪽 좌석의 기장은 기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정과 위험, 그리고 비행기에 탑승한 수백 명의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
“보잉 777의 왼쪽 자리에 앉는 순간을 단 한 번도 당연하게 여겨본 적이 없습니다.”
하난 자와드 기장은 네 번째 스트라이프를 달았을 때의 감격을 ‘성취’보다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먼저 설명했다.
“비행할 때마다 제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제 어깨의 견장이 아닙니다. 비행기 뒤편 객실에 앉아 있는 수백 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우리에게 맡긴 ‘신뢰’입니다. 그 무거운 신뢰가 우리를 항상 철저하게 준비시키고, 가장 높은 수준의 안전 기준을 지키도록 만듭니다.”
바키타 알 므헤이리 기장 역시 왼쪽 좌석의 의미를 오직 ‘안전’이라는 단일 원칙으로 정의했다. 수많은 변수가 교차하는 상공에서 기장의 판단 하나에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어떤 결정 앞에서도 안전은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첫 번째 원칙입니다. 왼쪽 좌석으로 옮겨 앉는다는 것은 결국 그 안전에 대한 무게를 오롯이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아랍어 교과서에서 영어 매뉴얼로… 모국어를 뛰어넘은 15년의 분투
오늘날 두 사람이 거대한 쌍발 여객기를 능숙하게 통솔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치열한 드라마였다. 두 기장은 모두 15년 전 에미레이트항공의 자체 조종사 양성 과정인 ‘국립 생도 조종사 프로그램(National Cadet Pilot Programme)’에 입문하며 항공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만 해도 중동 항공업계에서 자국 여성 조종사를 찾아보기란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었다. 사회적 편견보다 먼저 맞닥뜨린 현실의 벽은 다름 아닌 ‘언어’였다.
알 므헤이리 기장은 초·중·고 정규 교육 과정을 전부 아랍어로 이수했다. 하지만 항공의 세계는 철저히 영어로 움직인다. 고도의 공기역학, 복잡한 항공전자 시스템, 기상학, 그리고 촌각을 다투는 항공 관제 용어까지 모든 전문 지식을 낯선 외국어로 백지상태에서 흡수해야 했다.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것과 비행이라는 완전히 생소한 학문을 배우는 일을 동시에 해내야 했습니다. 마치 두 개의 험난한 산을 한 번에 넘는 기분이었죠. 하지만 그 엄청난 학습 곡선을 거치며 한계를 깨뜨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쉽게 얻어지는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버텼다. 자와드 기장 역시 15년간 조종간을 놓지 않으며 겸손과 끈기를 체득했다.
“자신감과 겸손함은 늘 나란히 가야 합니다. 내가 받은 훈련과 비행 능력을 믿되, 언제나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죠. 성공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나를 지도해 준 수많은 교관, 함께 콕핏에 앉았던 부기장과 기장들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정답은 아니다”… 하늘이 가르쳐준 리더십
비행 경력이 쌓여 베테랑이 되어도 하늘길은 결코 익숙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캡틴이 꼽는 파일럿이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 역시 역설적이게도 ‘단 한 번도 같은 비행이 없다’는 점이다.
“두바이에서 사우디 담맘까지 1,000번을 날아본 항로라 해도, 오늘 떠나는 비행은 어제와 완전히 다릅니다.” 알 므헤이리 기장의 설명이다. 바람의 방향, 난기류, 기체 상태, 함께 호흡을 맞추는 승무원 구성까지 매 순간 조건이 바뀐다.
“기장이 되면서 가장 뼈저리게 배운 것은 ‘배움을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옳았던 판단이 오늘 환경에서는 틀릴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가변성 속에서 비행기를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밀한 조종 테크닉만이 아니다. 두 기장은 진정한 캡틴의 역량으로 ‘소프트 스킬(Soft Skills)’, 즉 사람을 이해하고 이끄는 공감과 소통 능력을 꼽았다.
기장은 콕핏 안에 갇힌 지휘관이 아니다. 기내에서 승객을 돌보는 객실 승무원, 지상에서 항공기를 점검하는 정비사와 지상 조업사, 하늘길을 안내하는 항공교통관제사까지 유기적으로 얽힌 거대한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야 한다.
“우리가 비행기 맨 앞자리에 앉아 있지만, 하나의 비행이 무사히 완성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물망이 필요합니다. 기장은 경청할 줄 알아야 하고, 상대방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멕시코 고원부터 뉴캐슬까지, 거인 B777을 길들이다
현재 두 기장이 몰고 있는 보잉 777-300ER은 최대 400명에 육박하는 승객을 태우고 대륙을 넘나드는 장거리 대형 여객기다. 이 거대한 기체를 하늘로 띄우는 심장은 GE 에어로스페이스의 ‘GE90’ 엔진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트 엔진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기계에 대해 두 조종사는 깊은 신뢰와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수년간 GE90 엔진과 함께 비행해 왔습니다. 극지방의 추위든 중동의 폭염이든, 어떤 가혹한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탁월한 출력을 뿜어내는 엔진이죠. 비행 중에 엔진 상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큼 조종사에게 든든한 안정감을 주는 요소는 없습니다.” 자와드 기장의 말이다.
알 므헤이리 기장 역시 엄지를 치켜세웠다.
“해발 고도가 높아 공기가 희박한 멕시코의 고지대 공항부터 활주로 길이가 짧기로 유명한 영국 뉴캐슬 공항까지,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이 엔진은 조종사가 요구하는 성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받쳐줍니다. 파일럿에겐 그야말로 경이로운 파트너입니다.”
“콕핏에 여성이 앉아 있는 풍경이 평범한 일상이 되기를”
두 사람의 기장 승격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아랍에미리트 사회 전체에 던지는 조용한 혁명이다. UAE 정부는 최근 수년간 국가적 비전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과 전문직 진출을 적극 장려해 왔다. 두 사람은 그 비전이 3만 5천 피트 상공에서 현실로 구현된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지만 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최초’라는 화려한 수식어에 머물지 않는다.
“제가 처음 훈련생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항공 분야에 여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점점 더 많은 아랍 여성들이 조종사를 꿈꾸며 도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큰 보람입니다. 단 한 명의 소녀라도 ‘나도 저 조종석에 앉을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자와드 기장의 바람이다.
알 므헤이리 기장은 더 담담하면서도 단단한 포부를 밝혔다. 그녀가 바라는 진정한 변화는 ‘특별함’이 지워지는 순간이다.
“언젠가 비행기 조종실 문이 열렸을 때 아랍 여성이 왼쪽 기장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무런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저 ‘출근해서 늘 하던 일과를 시작하는 평범한 하루(Just another day at the office)’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세상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하늘을 꿈꾸는 다음 세대,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망설이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향해 묵직한 조언을 남겼다.
“무엇을 선택하든 가슴이 뛰는 일을 찾으세요. 조종사가 되든, 엔지니어가 되든,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진짜 가치 있는 일들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공부를 끝마치는 것도, 학위를 따는 것도, 원하는 직장을 얻는 것도, 심지어 건강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원래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어렵게 얻어지는 법이니까요.”
1미터의 거리를 건너기 위해 15년을 바친 두 캡틴. 그들이 창공에 수놓은 궤적은 거친 사막의 바람을 뚫고 미래로 날아오르는 중동의 새로운 날갯짓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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