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는 한국 여행객이 꾸준히 찾는 규슈의 여행지다.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한 날씨 덕분에 골프 여행이 일찍 자리 잡았고, 다카치호협곡과 마나이폭포, 아오시마와 니치난 해안을 찾아가는 자유여행객도 적지 않다. 미야자키현의 외국인 숙박객 가운데 한국인이 큰 비중을 차지해온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그런 미야자키를 여행지가 아닌 역사 지도로 펼쳐놓으면 전혀 다른 길이 나타난다. 가야와 백제, 바다 건너 왜의 관계를 따라가다가 일본 왕실의 건국신화가 집중된 곳을 찾으면 다카치호와 기리시마가 나온다. 한쪽에는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강림 전승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백제 멸망 뒤 왕족이 바다를 건너와 살았다는 이야기를 품은 신사와 제례가 남아 있다.
일본 고대국가의 정치적 중심은 나라분지와 긴키 지역에서 성장했다. 야마토 왕권도 그곳에서 세력을 넓혔다. 그런데 712년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가 정리한 왕실의 시작은 야마토에 머물지 않고 남규슈로 내려간다. 니니기가 ‘휴가의 다카치호’에 내려오고, 그 후손으로 이어지는 진무는 다시 남규슈에서 동쪽으로 떠나 야마토에 들어간다.
왕권이 성장한 곳과 왕실이 자신의 시작을 설명한 곳이 서로 다르다. 그 사이에 어떤 기억이 있었는지, 왜 8세기 초 일본의 국가적 역사서가 왕실의 출발을 이런 모습으로 정리했는지는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 질문을 따라가려면 미야자키에서 곧바로 『고사기』를 펼칠 것이 아니라, 훨씬 앞선 시대의 바다부터 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남부와 규슈 사이, 쌀이 건너던 바다
일본열도에서 수전농경이 확산된 야요이시대를 들여다보면 북부 규슈와 한반도 남부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벼농사 기술과 토기, 생활문화가 북부 규슈에 자리 잡았고, 사람의 이동도 함께 있었다는 것은 일본 선사·고대사를 설명하는 중요한 연구축이다. 일본열도 곳곳에서 같은 시기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북부 규슈에서 먼저 새로운 농경문화가 자리 잡고 시간이 흐르면서 동쪽으로 퍼져갔다.
지도를 놓고 보면 한반도 남해안과 북부 규슈 사이에는 쓰시마와 이키가 있다. 오늘날 지도에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지만 당시 바다는 사람과 물자를 싣고 건너는 통로였다. 논을 만들고 물을 대는 기술이 움직였다면 그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건넜을 것이고, 토기와 도구가 이동했다면 그것을 만들던 생활방식 역시 바다 건너 새로운 땅에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쌀농사가 정착하면 마을의 모습도 달라진다. 물길을 만들고 논을 관리해야 하며,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규모가 커지고 생산물이 늘어나면서 그것을 관리하는 권력도 자랄 수밖에 없다. 일본열도에서 야요이 사회를 거쳐 여러 정치집단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벼농사의 확산을 빼놓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 바닷길을 조금 더 내려가면 이번에는 철이 보인다.

철을 따라가면 가야와 왜가 가까워진다
한반도 남부에서 철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은 동아시아 해상교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가야의 여러 정치집단은 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주변 지역과 촘촘한 관계를 맺었다. 철은 농기구와 생활도구가 됐고, 전쟁에서는 무기와 갑옷이 됐으며, 많은 철을 확보해 나눌 수 있는 능력은 정치적 힘과도 직결됐다.
일본열도에서도 철의 수요는 커졌다. 야요이시대와 고훈시대를 거치며 철제 농기구와 무기 사용이 늘어났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철기와 각종 교역품은 두 지역을 오간 바닷길을 보여준다. 철만 움직인 것도 아니다. 토기와 유리구슬, 무기와 갑옷, 말갖춤이 함께 나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말과 새로운 군사기술까지 일본열도에 들어간다.
김해와 부산 앞바다에서 규슈를 바라보면 현대의 국경보다 항구와 항로가 먼저 떠오른다. 어느 나라의 철이냐는 구분보다 어느 곳에서 좋은 철을 구할 수 있었는지, 어느 세력과 손을 잡아야 안전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는지가 더 절실했을 시대다. 김해 대성동과 함안 말이산, 고령 지산동 같은 가야 고분군에서 나온 무기와 갑옷, 말갖춤과 교역품을 보고 있으면 가야가 한반도 안에서만 움직였던 세계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 바다를 오간 사람들에게 지금의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구분을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렵다. 가야의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 백제에서 온 사람, 규슈의 어느 정치집단에 속한 사람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교역하고 싸우고 혼인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의 관계가 수백 년 쌓인 뒤 문헌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는 상대가 백제와 왜다.

백제와 왜, 멸망보다 훨씬 앞서 이어진 관계
백제와 왜의 관계는 660년 백제 멸망보다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왕족과 사신이 오갔고 승려와 학자, 장인과 기술자가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문자와 불교, 건축과 각종 기술이 이 길을 따라 전해졌으며, 6세기 기록에는 백제와 왜 양쪽의 정치적 관계 속에서 활동한 인물들도 확인된다.
이 오랜 관계 위에서 660년 백제 멸망과 663년 백강전투를 보면 전쟁의 크기가 달리 보인다. 백제가 무너진 뒤 백제 부흥군은 왕조를 다시 세우려 했고, 왜는 대규모 병력과 선박을 한반도로 보냈다. 이미 멸망한 나라의 부흥전쟁에 왜가 이 정도의 군사력을 투입했다는 사실은 두 지역의 관계가 단순한 외교적 친선 이상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백강에서 당·신라 연합군에 패한 뒤 왜는 바다 건너 상황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규슈와 세토나이카이를 중심으로 방어시설이 세워졌고, 그 과정에 백제에서 건너간 장수와 기술자들이 참여했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넌 뒤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백제에서 익힌 토목과 축성 기술, 문자와 학문, 종교와 행정 경험은 일본열도의 새로운 생활 속에 들어갔다.

백강 이후 왜에서 일본으로
백강 패전 뒤 일본열도의 정치질서는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당·신라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망이 만들어졌고, 천무·지통조를 거치면서 중앙집권적 율령체제가 정비됐다. 7세기 후반부터 ‘천황’이라는 군주호와 ‘일본’이라는 국호가 자리 잡기 시작했고, 701년 대보율령을 거쳐 8세기 초에는 새 국가의 제도와 명칭이 훨씬 분명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는 긴 시간 동안 성장해온 야마토 왕권이라는 기반이 있었다. 일본열도 내부의 정치적 통합 역시 수백 년 동안 진행돼 왔다. 여기에 660년 백제 멸망과 663년 백강 패전이라는 대외 위기가 겹치면서 국가체제의 정비 속도가 빨라졌고, 그 과정은 712년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 편찬으로 이어졌다. 나라의 이름과 군주호, 율령체제와 수도가 정리되는 시기에 왕실의 기원과 국가의 역사도 함께 정리된 셈이다.

『일본서기』 속에 남아 있는 백제의 기록
『일본서기』 편찬에는 학계에서 ‘백제삼서’라고 부르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가 활용됐다. 세 책의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일본서기』에 인용된 내용과 표현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일본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편찬 과정과 성격을 연구해왔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보고에 실린 니토 아쓰시의 연구는 백제삼서가 『일본서기』 편찬 사료로 활용된 과정과 함께 일본에 정착한 백제계 씨족의 역할을 검토한다. 8세기 초 일본에 살던 백제계 집단이 기존의 백제계 자료와 조상 전승을 정리하는 과정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본 왕권이 자신의 역사를 국가적 기록으로 정리하면서 백제 쪽에서 전해진 사료와 백제계 사람들의 기억을 활용했다는 점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온 한반도계 사람들이 있었다. 백제 왕족의 후손을 자처한 백제왕씨를 비롯해 한반도에 뿌리를 둔 여러 씨족이 일본 정치와 문화 속에서 활동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왕실의 가장 오래된 시간을 설명하면서 가리킨 곳이 남규슈였다.

야마토 왕권의 기원신화가 향한 곳, 다카치호와 기리시마
『고사기』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는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천손강림의 장소로 기록된 ‘휴가의 다카치호’를 두고 여러 전승지가 남아 있으며, 미야자키 북부 다카치호와 미야자키·가고시마 경계의 기리시마산 일대가 대표적이다.
다카치호에는 구시후루신사가 있고, 아마테라스가 동굴에 숨었다는 전승과 연결된 아마노이와토신사와 아마노야스카와라도 있다. 기리시마산의 다카치호봉에는 니니기가 내려왔다는 전승이 남아 있으며, 산 아래 기리시마신궁은 니니기를 주신으로 모신다. 남규슈의 넓은 지역에 천손강림과 왕실 조상에 관한 기억이 깊게 남아 있다는 사실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신화는 몇 세대를 지나 진무에게 닿는다. 진무는 남규슈에서 동쪽으로 떠나 야마토에 들어가 초대 천황이 됐다고 전해지며, 미야자키에는 그의 출생과 성장, 출발을 연결하는 여러 전승지가 남아 있다. 일본 왕실의 신화적 계보를 따라가면 산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미야자키의 들과 바다를 지나 마지막에는 야마토로 향하는 긴 이동으로 구성돼 있다.
이 대목에서 한반도 남부의 건국신화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해 구지봉에서 하늘로부터 금합이 내려오고 그 안의 알에서 수로가 태어나 왕이 된다. 다카치호에서는 왕실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김해에서는 왕이 될 인물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다. 사람과 농경기술, 철과 토기, 혼인과 전쟁이 오갔던 바다에서 왕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와 제사, 신앙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이번 역사기행에서 오래 들여다볼 주제다.
일본 건국신화의 땅에서 만나는 백제왕
미야자키에서 더 흥미로운 장소는 산간의 미사토에 있다. 남고의 신몬신사에는 백제 왕족 정가왕이 이곳에 정착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고, 약 90㎞ 떨어진 기조초의 히키신사에는 그의 아들 복지왕을 모신다. 미야자키현은 두 왕의 전승과 함께 신몬신사, 관련 유물, 시와스마쓰리를 지역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자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신몬신사는 718년에 창건됐다고 전하며, 17세기에 세운 현재 본전은 일본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인근 ‘서쪽의 정창원’에는 신몬신사에서 전해진 유물과 이 지역에서 발견된 자료들이 보관·전시된다. 매년 겨울 열리는 시와스마쓰리에서는 히키신사에서 신몬신사까지 약 90㎞를 이동한다. 헤어진 정가왕과 복지왕 부자가 1년에 한 번 만난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의례로, 미야자키현은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전통으로 소개한다.
일본 왕실의 시작을 설명하는 신화가 집중된 남규슈에서 백제왕 전승과 신사, 유물, 오랜 제례를 함께 만난다는 사실은 이곳을 직접 볼 이유를 충분히 만들어준다. 같은 지역에 남은 두 종류의 오래된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계속 마주하게 된다.
국경이 생기기 전의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이번 역사기행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가 만들어진 뒤의 시선만으로 고대를 바라보지 않는다. 쌀농사가 북부 규슈로 들어가던 때도, 가야의 철이 바다를 오가던 때도 지금과 같은 국경은 없었다. 백제와 왜가 사신과 사람을 주고받던 시대에도 바다를 건너는 사람에게 현대의 국적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먼저 김해와 부산의 고분과 바다를 보고, 쓰시마와 이키를 건너 북부 규슈의 야요이 유적으로 향한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지나 남규슈로 내려오면 다카치호와 기리시마의 천손강림 전승을 만나고, 미사토에서는 백제왕을 모신 신사와 오랜 제례를 보게 된다. 그 길의 끝에서는 다시 나라와 오사카로 올라가 야마토 왕권의 고분과 도성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유적에는 당시 사람의 목소리가 남아 있지 않다. 기록도 왕과 전쟁, 사신과 제도를 중심으로 남았을 뿐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모두 전하지 못한다. 그 빈자리에서는 유물과 지형, 바다의 방향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어떤 길을 선택했을지 그려볼 수 있다.
김해 고분의 새벽 안개 속에서 긴 창을 든 가야 무사를 떠올리고, 다카치호의 산길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니니기의 이야기를 처음 전하던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에게 현대의 질문을 던지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기록과 유물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이어갈 역사기행의 방식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쌀과 철, 사람과 기술, 그리고 신화까지. 지금부터 그 오래된 길을 하나씩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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