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25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레이싱카 콕핏을 들여다본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핸들을 움켜쥔 손도, 브레이크를 밟을 발도, 땀을 흘리는 드라이버도 없다. 빈 운전석을 차지한 것은 라이다와 레이더, 고성능 카메라, 실시간으로 궤적을 계산하는 컴퓨터다.
SF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9월 5일 이탈리아의 상징인 이몰라 서킷에서 실제로 벌어진 유럽 최초의 5대 동시 자율주행 레이스다. 아일톤 세나가 숨을 거둔 곳이자 좁은 노폭과 고저 차, 빠른 코너로 인간 드라이버에게도 악명 높은 트랙에 운전자 없는 머신 5대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테슬라 오토파일럿? 여기서는 시속 250km 배틀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율주행은 고속도로에서 차선을 유지하거나 돌발 장애물을 감지해 멈춰 서는 장면이다. 모터스포츠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한계 속도로 코너에 진입하면서 앞차의 움직임을 읽고, 추월선을 고르고, 접촉을 피하는 판단을 순식간에 끝내야 한다.
아부다비 첨단기술연구위원회(ATRC) 산하 ASPIRE가 운영하는 A2RL(Abu Dhabi Autonomous Racing League)은 쉽게 말해 ‘인공지능판 F1’이다. 극한의 횡가속도가 걸리는 트랙에서 AI 알고리즘만으로 상대 차를 추월하고 방어하며 타이어 접지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동안 아부다비 야스 마리나 서킷에서 기술을 갈고닦은 A2RL은 이번에 처음 유럽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몰라에서 열린 ACI 레이싱 위크엔드에 키네티즈, 컨스트럭터 레이싱, 폴리무브, 유니모어, TUM 등 세계 정상급 대학·연구팀의 머신 5대가 동시에 출발했다.

EAV-25, 하드웨어는 같다… 결국 코딩 실력 싸움
A2RL의 규칙은 잔인할 정도로 공정하다. 머신은 달라라 SF23 슈퍼 포뮬러 섀시를 자율주행용으로 개조한 EAV-25다. 2.0리터 터보 엔진과 섀시, 타이어, 센서와 컴퓨팅 장비까지 동일한 사양을 사용한다. 차의 마력이나 값비싼 부품으로 상대를 누를 여지가 없다.
승부를 가르는 것은 각 팀의 컴퓨터 공학자들이 짜 넣은 소프트웨어다. 인지(Perception)는 주변 차량과 트랙을 읽고, 경로계획(Planning)은 추월선과 제동점을 고르며, 제어(Control)는 조향과 가속·제동 명령을 실제 차체에 전달한다.
- 앞차가 인코너를 막으면 아웃코너로 찌를 것인가.
- 타이어 접지력이 무너지는 한계점을 AI가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 시속 250km에서 돌발 감속한 앞차를 발견하면 제동할 것인가, 피할 것인가.
인간 드라이버의 ‘동물적 감각’을 수학과 코드로 치환한 천재들의 두뇌 싸움이다. 연구실에서는 재현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속도와 다중 차량의 상호작용이 트랙 위에서 한꺼번에 터진다.

시속 252.3km에서 터진 충돌… AI도 물리법칙은 피하지 못했다
2024년과 2025년 A2RL을 연속 제패한 독일 TUM은 포메이션 랩에서 발생한 기술 문제로 제대로 승부를 펼치지 못했다. 출발 전부터 절대강자가 흔들리면서 레이스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폴포지션을 잡은 이탈리아 유니모어는 1분 37초394의 랩타임으로 인간 레이스의 기준 기록에 1초도 채 뒤지지 않는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선두를 달리던 머신에 기술 문제가 발생해 트랙에서 급격히 속도가 떨어졌다.
바로 뒤에서는 이탈리아 폴리무브 머신이 이번 대회 최고 속도인 시속 252.3km를 찍으며 따라붙고 있었다. 앞차가 갑자기 느려지는 상황을 감지했지만 제동과 회피에 쓸 수 있는 물리적 거리는 너무 짧았다. 결국 폴리무브가 유니모어의 뒤를 들이받으면서 두 팀의 우승 경쟁은 사실상 끝났다.
인간이 탔다면 심각한 인명 사고로 번질 수 있는 충돌이었다. 하지만 운전자가 없었기에 부상자는 없었다. 사고 뒤 폴리무브와 유니모어는 각각 3위와 4위로 분류됐다. 깨진 것은 머신이었고, 남은 것은 고속 자율주행이 돌발 감속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값비싼 데이터였다.
최후의 승자 UAE 키네티즈… 12랩을 살아남았다
혼란을 뚫고 12랩의 체커기를 가장 먼저 받은 팀은 UAE의 키네티즈였다. 선두권의 기술 문제와 충돌을 피해 빈틈을 파고든 키네티즈는 독일 컨스트럭터 레이싱을 약 11초 차로 따돌리고 A2RL 최초의 해외 레이스 우승팀이 됐다.
결과는 키네티즈 우승, 컨스트럭터 레이싱 2위, 폴리무브 3위, 유니모어 4위 순이었다. 두 차례 챔피언 TUM은 기술 문제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똑같은 차체와 엔진으로 출발했지만 결승선을 가른 것은 각 팀이 축적한 코드와 판단 체계였다.
A2RL이 이처럼 위험한 속도를 고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속 30km 무인 셔틀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센서 지연, 차량 간 상호작용, 한계 제동과 회피 문제를 극단적인 환경에서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몰라에서 수집한 데이터는 A2RL의 시험장과 스즈카, 야스 마리나에서 쌓아온 기록과 함께 고속 자율주행 인지·판단·제어 기술을 검증하는 데 쓰인다.
인간의 눈과 손을 완전히 떼어낸 채 오직 코드로 시속 250km를 질주하고, 스스로 추월을 결단하는 머신들. ‘목숨 없는 검투사’들의 경기는 자율주행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준 동시에, AI도 물리법칙과 돌발 상황 앞에서는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숨김없이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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