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신문 ㅣ 박예슬 기자
담양에서 8월 배롱나무를 찾으면 가장 먼저 명옥헌 원림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고서면 분향리 산기슭에는 검은 기와와 돌담 사이로 배롱나무꽃이 번지는 또 하나의 오래된 공간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99호인 죽림재다.
죽림재는 꽃을 보기 위해 만든 정원이 아니다. 죽림 조수문이 세운 정사에서 시작해 창녕 조씨 문중의 강학 장소로 이용됐고, 여러 차례 소실과 복원, 사우 건립을 거쳐 지금의 전각군을 갖췄다.
이곳의 여름 풍경이 특별한 이유는 배롱나무가 문화유산을 덮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붉은 꽃 사이로 기와지붕과 처마선, 돌담과 마당이 계속 모습을 드러낸다.

기와 대문을 지나면서 시작되는 죽림재의 시간
죽림재를 처음 만나는 장면은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나지막한 돌담과 목조 대문이다. 대문을 통과한 뒤 마당과 건물이 차례로 열린다.
죽림재는 죽림 조수문이 건립한 정사로 시작했다. 창녕 조씨 문중의 강학 장소로 이용되던 초창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문적과 함께 불탔다.
1623년 인조 원년에는 조수문의 6대손 삼청당 조부가 다시 건물을 세웠다. 현재의 죽림재 역사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중건 시점이다.
이후 사우 건립과 이건, 서원철폐령에 따른 훼철과 복원 과정을 거치며 강학과 제향의 공간이 함께 남았다.

배롱나무 사이 죽림서원 현판이 보여주는 공간의 성격
사진에서는 분홍빛 배롱나무꽃과 초록 잎 사이로 죽림서원 현판이 보인다. 꽃과 현판, 처마가 한 장면에서 만나 죽림재의 계절성과 장소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1708년에는 조수문과 그의 아들 운곡 조호의 덕행을 기리기 위한 죽림사가 세워졌고, 1751년 현재 죽림재가 있는 위치로 옮겨졌다.
강학 공간과 사우가 같은 곳에 자리하면서 죽림재는 서원 형태로 발전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는 과정도 겪었다.
죽림재를 단순한 고택보다 강학과 제향의 기능이 결합된 문화유산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비석군에서 읽는 문중의 기억
죽림재 한쪽에는 여러 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뒤쪽으로 목조 전각이 보이고 앞에는 서로 다른 형태의 비석이 이어진다.
이 장면은 죽림재가 꽃을 보기 위한 정원만이 아니라 문중 교육과 제향의 역사가 남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배롱나무철에도 문화유산이라는 성격이 우선한다. 현장에서 확인하지 않은 비문의 인물과 공적을 임의로 추정해 설명해서는 안 된다.
전각과 비석, 담장의 위치를 살피며 걸으면 죽림재가 한 시대에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변화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배롱나무 한 그루가 한옥 풍경을 바꾸는 8월
죽림재의 여름에는 커다란 배롱나무와 낮은 전각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 장면이 중심이 된다. 짙은 초록 잎 사이로 붉고 분홍빛 꽃이 이어진다.
꽃나무 가까이에서 꽃만 확대하기보다 몇 걸음 물러서 한옥의 지붕과 나무 전체를 함께 담으면 죽림재 특유의 공간감이 살아난다.
배롱나무 개화는 기온과 강수량에 따라 해마다 달라지므로 특정 날짜보다 현장 개화 상태를 확인해 방문하는 편이 좋다.
한낮보다 오전과 늦은 오후에는 처마와 꽃 사이의 명암차가 줄어 한옥과 배롱나무를 함께 촬영하기 수월하다.

겹겹이 이어지는 기와지붕과 배롱나무
높은 시점에서 보면 죽림재 여러 전각의 기와지붕과 낮은 담장이 서로 다른 높이로 겹친다. 그 사이마다 배롱나무와 여름 숲이 끼어든다.
한 군데의 큰 꽃밭이 공간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전각과 마당, 문 사이에서 각각 다른 꽃 장면을 만나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죽림재는 빠르게 한 바퀴 돌기보다 대문과 현판, 마당, 전각, 꽃나무를 순서대로 살펴보는 편이 낫다.
규모보다 한옥과 계절 식생의 관계를 세밀하게 보는 여행지라는 점이 죽림재의 차별점이다.
명옥헌과 함께 보면 담양 배롱나무 여행이 달라진다
명옥헌 원림은 네모난 연못과 정자, 오래된 배롱나무가 만드는 원림 경관이 중심이다. 죽림재는 연못보다 기와지붕과 돌담, 문과 배롱나무가 가까이 맞닿는 장면이 많다.
두 곳을 함께 보면 같은 배롱나무꽃이 전통 원림과 서원 공간에서 어떻게 다른 풍경을 만드는지 비교할 수 있다.
시간이 더 있다면 식영정과 환벽당, 소쇄원으로 이동해 담양의 정자문화와 가사문학까지 연결할 수 있다.
배롱나무를 보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 조선시대 강학 공간과 정자, 원림, 문학을 따라가는 담양 문화 답사로 확장되는 동선이다.
담양 죽림재 여행정보
주소 전남 담양군 고서면 잣정길 88-7
국가유산 전라남도 기념물, 1987년 1월 15일 지정
주요 볼거리 죽림재 전각, 죽림서원 현판, 죽림사, 비석군, 돌담, 배롱나무
여름 관람 포인트 기와지붕과 배롱나무, 현판과 꽃, 전각군을 함께 보는 높은 시점
관람료 별도 입장료 없이 관람하는 곳으로 안내
주차 정문 인근 소규모 공간, 꽃철에는 혼잡 가능
추천 코스 죽림재 → 명옥헌 원림 → 식영정·환벽당 → 소쇄원
주의사항 전각과 비석 접촉 자제, 배롱나무 가지 훼손 금지, 문중 행사와 현장 안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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