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 5.0 ② 일본 관광객은 VIP, 그러나 한국인에게 여행의 자유는 없었다

일본 관광객은 최고급 호텔에 묵고 관광버스로 한국을 누볐지만, 정작 한국인에게는 해외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국내 관광지도 손에 꼽았고 설악산과 제주도조차 도로와 숙박시설이 부족했다. 외국인을 받아 외화를 벌기 위해 시작된 한국 관광산업의 초기 풍경을 돌아본다.

1970년대 공항에서 한국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일본인 단체관광객
1970~80년대 한국 인바운드 관광산업은 일본인 단체관광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가온 기자 ㅣ 여행레저신문

 

한쪽으로만 열린 문

1970~80년대 한국의 관광 정책은 방향이 뚜렷했다. 정부는 일본 관광객 유치에는 적극적이었지만, 한국인이 관광 목적으로 해외에 나가는 것은 오랫동안 허용하지 않았다. 외국인이 들여오는 달러와 엔화는 절실한 외화였고, 반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쓰는 돈은 억제해야 할 유출로 취급됐다.

한국인이 관광 목적으로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된 것은 1989년부터다. 2026년 현재로 37년째이니, 여행의 자유를 누린 역사는 아직 반백년도 되지 않은 셈이다. 여행 욕구 자체는 그전에도 있었다. 설악산이나 제주도를 다녀온 사람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몰렸고, 해외 경험담은 거의 무용담처럼 회자됐다. 다만 법과 인프라, 두 가지가 모두 갖춰지지 않았다.

일본 단체관광이 이끈 초기 인바운드 산업

1970년대 한일 간 경제력 격차는 지금의 감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컸다. 일본이 자동차·전자산업을 앞세워 선진 경제로 도약하는 동안,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막 벗어나려던 개발도상국이었다.

일본이 인바운드 시장의 중심이 되기 전, 초기 한국 인바운드 관광의 중심은 구미(歐美), 즉 미국과 유럽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축을 이룬 것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한 ‘리비지트 코리아(Revisit Korea) 프로그램’이었다. 자신이 싸웠던 땅을 다시 찾는 미국 중심의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이 초기 인바운드 수요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장의 중심은 빠르게 일본으로 옮겨갔다. 도쿄·오사카발 단체관광이 늘고, 이후 일본 지방 도시로까지 영업망이 확대됐다. 일정은 대개 2박 3일에서 3박 4일. 같은 비행기, 같은 버스, 같은 호텔, 같은 식당, 같은 관광지를 도는 정형화된 패키지였다.

경복궁이나 남산 같은 문화 관광지도 일정에 포함됐지만, 남성 중심 단체상품의 핵심은 성매매를 동반한 이른바 ‘기생관광’이었다. 여행사와 가이드는 호텔·식사·관광 일정을 소화한 뒤 저녁에는 업계에서 ‘엔카이(宴会)’라 부르던 요정 자리로 손님을 안내하고 여성을 알선하는 것까지를 실질적인 업무로 여겼다. 서울의 삼청각·대원각, 경주의 요석궁, 제주의 송원과 버드나무집(柳屋)이 이런 요정들이었고, 사실상 일본 단체관광 상품의 핵심 거점이었다. 제주에는 1970년대만 해도 다섯 곳가량의 요정이 있었지만 80년대 들어 두어 곳으로 정리됐다. 상품의 부수적 ‘옵션’이 아니라 매출의 핵심 축이었고, 가이드와 여행사의 수익 구조 자체가 여기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

이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태국, 필리핀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초기 인바운드 관광산업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외화가 절실했던 개발도상국이 관광산업의 첫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성매매를 낀 남성 단체관광이 초기 자본과 인프라를 만드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패턴은 여러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기생관광 역시 그 보편적 경로 위에 있었던 셈이다. 도덕적으로 미화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국만의 예외적 일탈로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이 시기에 쌓인 호텔·여행사·가이드·항공 인프라와 자본이, 이후 문화·자연 중심으로 전환된 한국 관광산업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산업사적으로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 자리를 채웠던 이들의 노동 역시, 의도했든 아니든 그 토대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당시에도 이런 구조에 대한 비판은 있었다. 일본 내에서 자국 남성들의 원정 성매매 관광을 문제 삼는 여론이 있었고, 한국 여성단체 역시 정부의 묵인·방조를 지적했다. 일본의 수학여행단과 여성 관광객 비중이 늘어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이며, 이때부터 상품 구성도 점차 문화·관광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여행사와 가이드 체제

시장은 소수 대형 여행사가 주도했다. 한국에서는 대한여행사, 한진관광, 세방여행사, 롯데관광 등이, 일본에서는 JTB, 니혼료코, 긴키닛폰투어리스트, 한큐 익스프레스 등 5대 여행사가 한국행 단체송객을 맡았다. 일본 여행사는 여러 한국 여행사에 물량을 나눠 배정하고, 서비스 품질과 매출 실적에 따라 다음 물량을 조정했다.

단체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었다. 어느 여행사를 통해 왔든 한국에 도착하면 결국 같은 엔카이로 흘러갔고, 식사도 불고기 외에는 이렇다 할 차별화가 없었다. 상품 구성 자체가 획일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한국 쪽 인바운드 업체는 우후죽순 늘어났다. 엔화가 강세였던 만큼 일본 관광객을 유치하면 그만큼 벌이가 됐기 때문이다. 여러 한국 여행사가 일본 현지에 판촉사무소를 두고 주재원을 상주시켰고, 그 사무소들끼리 가격을 내리고 물량을 따내려는 덤핑 경쟁까지 벌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무질서한 경쟁이었지만, 이 시기의 각축 자체가 여행사들의 몸집과 경험을 키운 시기였다.

한국 여행사는 공항 영접부터 숙박, 식사, 관광, 쇼핑, 엔카이, 출국까지 전 일정을 책임졌고, 일본어 가이드는 단순 안내자가 아니라 단체 전체를 이끄는 현장 총괄자였다. 이 무렵은 여행사 소속 가이드가 중심이었고, 오늘날 같은 프리랜서 가이드 시장은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다.

가이드의 역량, 특히 쇼핑 매출 유치 능력은 여행사 수익과 직결됐다. 일본 관광객의 소비력이 컸던 만큼 유능한 가이드는 업계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 “일본어 가이드를 몇 년 잘하면 집 한 채를 산다”는 말이 업계에서 실제로 오가던 이야기였다. 다만 판매 품목은 제한적이었다. 한국의 공산품 경쟁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했던 탓에, 관광 쇼핑은 자수정·인삼·청자 같은 한국 고유 품목에 집중됐다.

1970년대 후반 설악산과 속초로 향하는 국도와 초기 관광시설
당시 설악권은 가장 이름난 관광지였지만 속초까지 고속도로가 없었고 숙박과 편의시설도 크게 부족했다.

외국인 호텔은 있었지만, 한국인의 관광지는 없었다

일본 관광객이 서울 최고급 호텔에 묵는 동안, 정작 한국인에게 호텔은 익숙한 숙박 개념이 아니었다. 내국인은 여관이나 여인숙을, 해수욕장·산간 지역에서는 민박을 이용했다. 자가용 보급률이 낮았던 만큼 모텔이라는 개념도 아직 생소했다.

외국인을 위한 호텔·관광버스·여행사 인프라는 갖춰지고 있었지만, 한국 국민이 여행할 수 있는 국내 관광지는 경주, 제주도, 설악산, 속리산 정도로 손에 꼽았다. 여름철에는 대천·해운대·경포대·망상 해수욕장에 인파가 몰렸다. 관광지가 알려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로와 숙박, 편의시설을 갖춘 곳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초기에 관광지로 부상한 배경에는 이 기생관광 구조도 있었다. 서울에서 접대를 마친 일본인 단체가 여성을 데리고 제주까지 내려가는 일정이 붙으면서, 서울에 이어 제주에도 요정과 숙박 인프라가 함께 자리 잡았다. 관광지로서 제주의 성장이 순전히 자연경관 덕분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 시기 제주 숙박 인프라의 중심은 대한항공(한진그룹) 계열의 호텔이었다. 제주칼호텔과 서귀포칼호텔이 각각 제주시와 서귀포 관광의 거점 역할을 했고, 항공사가 노선과 숙박을 함께 쥐고 있던 구조는 초기 제주 관광산업의 성격을 상당 부분 규정했다. 이후 관광 수요가 커지면서 롯데호텔이 제주에 진출했고, 뒤이어 신라호텔도 들어서며 특급호텔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칼호텔 중심의 단일 체제에서 대기업 계열 호텔들이 각축하는 다변화된 시장으로 넘어간 것도 제주 관광이 성장해온 궤적을 보여주는 한 축이다.

가장 잘 알려졌던 설악산조차 접근이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국도로 네다섯 시간을 달려야 했고, 당일치기 여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악동에는 민박집과 소규모 음식점이 있는 정도였고, 1970년대 후반에야 숙박·상가 시설이 하나둘 정비되기 시작했다. 대포항·물치항·주문진 일대도 지금과 같은 대형 상권이 아니라 작은 포구였다. 비닐과 천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한 상인들이 하나둘 가게를 냈고, 그 가게가 다시 상가와 회센터로 커졌다.

한국의 관광지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길을 내고 숙박·식당을 만들면서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박정희 정부 시기 경주 보문관광단지 조성, 제주 관광개발, 설악동 정비, 관광호텔·도로 건설이 추진되며 국가가 기반을 놓았고, 그 위를 민박·여관·식당·여행사·전세버스·지역 상인들이 채워나갔다.

국내여행을 키운 전세버스와 신혼여행

국내여행도 이 시기부터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봄 꽃놀이, 여름 해수욕, 가을 단풍·등산이 대표적인 계절 수요였고, 직장·계모임·동네 단위의 전세버스 여행이 흔했다. 신혼여행은 이 수요를 키운 중요한 축이었다. 경주가 오랫동안 대표적 신혼여행지였고 설악산·제주도가 뒤를 이었지만, 제주도는 항공료 부담과 숙박 부족으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이 시기 국제선을 이용한 한국인 다수는 관광객이 아니었다. 중동 건설현장 근로자, 원양어선 선원, 상사 주재원,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에게 비행기는 여가의 수단이 아니라 외화벌이를 위한 노동의 교통수단이었다.

1980년대 해외여행 소양교육을 받는 한국인들
해외여행자는 소양교육을 받고 교육필증을 제출해야 여권 발급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1983년 제한적 개방, 1989년 전면 자유화

해외여행은 오랫동안 엄격히 통제됐다. 1983년부터 50세 이상 국민에 한해 제한적으로 관광여권이 발급됐고, 조건은 200만 원을 1년간 예치하는 것이었다 — 당시 평범한 가정에는 결코 가벼운 금액이 아니었다. 여권을 받으려면 해외 예절·안전수칙 교육뿐 아니라, 북한 공작원 접촉과 재일 조총련 관련 안보·반공 교육도 함께 받아야 했고, 교육필증을 제출해야 발급 절차가 진행됐다. 이런 제약 속에서 해외여행은 극히 드물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일본에 다녀온 사람에게 화장품·전자제품·워크맨을 사다 달라는 부탁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이 규제는 단계적으로 풀렸다. 1987년 9월 예치금 제도 자체가 폐지되고 연령 제한도 45세로 낮아졌으며,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40세로 한 번 더 낮아졌다. 그리고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며 법적 장벽은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국제선 항공료는 소득 수준에 비해 여전히 비쌌고 노선·좌석 공급도 제한적이었다. 저비용항공사가 등장하고 항공사 간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해외여행의 문턱이 실질적으로 낮아졌다. 즉 1989년은 법적 장벽을 없앤 해였을 뿐, 경제적 장벽은 소득 증가와 항공산업 발전을 거치며 이후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낮아졌다.

엔카이 문화의 종말 — 자유화가 아니라 경제 사이클의 전환

엔카이 산업이 무너진 원인을 단순히 ‘한국인 해외여행 자유화’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1989년 자유화로 한국인 출국이 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일본인 단체관광객의 감소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한국과 일본 양쪽의 경제 사이클이 같은 시기에 전환점을 맞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한국 경제가 급격히 활황을 타고 물가와 인건비가 오르자, ‘싼 맛에 오는’ 엔카이 관광의 가격 경쟁력이 먼저 흔들렸다. 한국의 서비스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저가 단체상품의 수익 구조 자체가 예전만큼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일본 쪽 요인이 거의 같은 시기에 겹쳤다. 1991년을 전후해 일본의 자산 버블이 붕괴하고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면서, 법인 접대비와 단체 회식·관광 예산이 전반적으로 축소됐다. 엔카이 문화 자체가 일본의 고도성장기 기업문화의 산물이었던 만큼, 그 기업문화가 위축되는 것과 동시에 원정 접대관광의 수요 기반도 함께 무너졌다.

즉 1989년 자유화는 한국 쪽 변화(경제성장에 따른 산물)의 일부였을 뿐, 그 자체가 엔카이 붕괴의 직접 원인이라기보다는 한일 양국의 경제 사이클이 동시에 전환점을 맞은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국은 성장의 정점으로, 일본은 장기 침체의 시작으로 각자 다른 방향의 전환을 겪으면서, 그 사이에 있던 엔카이 산업만 양쪽에서 동시에 지지대를 잃은 셈이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와 겹친다. 1995~97년 IMF 외환위기 직전까지는 한국인 출국자 수가 오히려 일본인 방한객 수를 웃돌 정도였다. 요정을 찾던 손님과 요정을 채우던 수요 기반이 비슷한 시기에 함께 흔들린 것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엔카이 문화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서울 3대 요정으로 꼽히던 곳들의 운명도 이 흐름 속에서 갈렸다. 삼청각은 1996년 ‘예향’이라는 일반음식점으로 개명했다가 경영난으로 1999년 문을 닫았고, 서울시가 매입해 2001년 전통문화공연장으로 재개관했다.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이 위탁 운영 중이다. 대원각은 주인이던 김영한 씨가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면서 사찰 길상사로 탈바꿈했다. 경주의 요석궁 역시 한 시절을 풍미한 요정이었다가, 이후 주인이 바뀌며 최부잣집 내림음식을 내세운 한정식집으로 재개장했다. 제주의 송원과 버드나무집을 포함해 한때 다섯 곳에 이르던 제주 요정들도 이 시기를 거치며 하나둘 문을 닫았다. 한 시대를 지탱했던 요정들이 문화공간과 절터, 한정식집으로 바뀌거나 아예 자취를 감춘 것 자체가, 이 산업이 어떻게 저물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닫힌 문에서 열린 문으로

오늘날 한국인은 주말과 휴가철마다 해외로 떠난다. 이 풍경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여행 자유화·경제성장·항공 대중화가 맞물리며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것이다.

일본 관광객 유치에는 적극적이면서 자국민의 여행 자유는 억제했던 모순적 출발점이 한국 관광산업의 초기 성격을 규정했다. 그 모순을 푼 해외여행 자유화는 사실 더 큰 흐름의 일부였다 — 한국은 성장의 정점을 향하고, 일본은 장기 침체의 초입에 들어서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초기 산업을 떠받치던 엔카이 경제가 저물었다. 한 시대가 닫히면서, 다음 시대가 열린 셈이다.

이정찬 발행인 ㅣ 여행레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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