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길 14년 만의 재발견, 한양도성 따라 걷는 늦가을 서울

서울 성곽길은 역사와 자연, 도심 풍경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서울의 대표 걷기 코스다. 2011년 한국관광공사 사보 청사초롱에 실렸던 원고와 사진을 바탕으로, 혜화문에서 숙정문과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늦가을 풍경을 14년 만에 다시 꺼내 온라인판으로 정리했다.

서울 성곽길과 한양도성 능선이 북악산 자락을 따라 길게 이어진 풍경
북악산 자락을 따라 굽이치는 서울 성곽길과 한양도성 능선 풍경.

올해가 가기 전 한 번쯤은 서울 성곽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이는 물론 풍경의 아름다움에 반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역사와 전통이 현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모습을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 성곽은 높이 10m, 총 연장 18km의 타원형으로 축조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한양 도성을 외적이나 도적의 침입으로부터 막고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건설했으며, 이후 1422년 세종대왕 때 돌로 축조되고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4개의 대문, 이른바 인의예지로 명명한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4개의 소문,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으로 출입을 했다고 하며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그 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양도성 성벽 옆으로 이어지는 돌계단과 오르막길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돌계단 길.

혜화문에서 시작한 느린 걸음

느린 걸음의 첫발은 동소문이라고도 불리던 혜화문에서 내려놓았다. 성문은 더 이상 길을 연계하는 중심에 있지 않고 굳게 닫혀 있을 뿐이다. 혜화문에서 서울과학고까지 성곽길은 늦가을 단풍이 한창이었다. 서울 사람으로 수십 년을 살아왔건만 이렇게 아름다운 단풍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잠시 끊어졌던 길은 다시 이어지면서 계절의 들고 남을 온몸으로 내보인다. 오랫동안 짝을 잃었던 석축은 백 년이 지나 다시 새로운 짝을 만났으니, 과거와 현재의 만남, 길고 긴 기다림의 가치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함께 길이 되고, 또 다른 천년을 함께 기약하니 의구한 산천의 일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숙정문까지 이어지는 늦가을 풍경

성곽길의 오른편으로는 돈암동과 성북동이 따라온다. 고층 아파트와 주택, 빌라로 빼곡한 도시는 지난여름 풍성하게 입었던 초록을 모두 내려놓고 본래 모습인 잿빛으로 돌아왔다.

붉고 노란 가을이 함께하는 말바위 안내소까지 2.5km 남짓한 길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 맺힐 정도의 기분 좋은 산책길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기에 좋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등록을 하고 비탈길을 200m가량 올라가면 서울의 북대문인 숙정문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그네를 기다린다. 도성 한양을 찾는 경기 북부 지역 사람들이 많이도 드나들었을 숙정문이다.

하지만 오늘 활짝 열린 숙정문에서는 소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고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린 아들을 목마 태운 나이 지긋한 아버지는 아이에게 지난 세월을 가르쳐주며 성곽 이곳저곳을 살핀다. 그리고 길은 아버지에게서 다시 아이로 이어지는 세월의 가치를 품는다.

청운대와 창의문, 서울을 다시 보게 하는 길

숙정문에서 1.2km 남짓한 길을 걷다 보면 청운대가 나온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한눈에 조망되는 멋진 곳이지만 오늘은 시계가 짧아 사진에 담을 수는 없다. 청명한 날이면 서울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금세 알게 된다.

청운대를 뒤로하고 북소문인 창의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늦은 오후에 시작한 여정으로 제한된 귀가시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다. 서울 성곽길 중 일부 구간은 허가를 받아야 하며 오후 5시 이후에는 출입할 수 없다.

바삐 디디던 발걸음을 북악 쉼터에서 잠시 멈추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긴다. 분명 성곽은 소통이 아니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무한 소통의 시대인 21세기의 서울 성곽 역시 단절 그 자체임을 확인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양 도성을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막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자 축조된 서울 성곽이 수백 년 지난 오늘날에는 나라와 민족의 사이를 빈틈없이 갈라놓는 또 다른 단절의 상징이 된 셈이다.

북악 쉼터에서 창의문까지의 길은 가파른 계단길이다. 첩첩이 이른 983계단에 도전해 보기 위해 창의문부터 이어지는 길을 택한다. 아마도 험한 길 끝의 성취감을 맛보기 위함일 게다.

서울에서 가장 시간이 더디게 간다는 부암동이 보이고, 감나무와 단풍나무가 제법 울창한 구기동이 보이더니 어느새 창의문이다. 이제는 그만 걸음을 멈춰야 할 때. 저 멀리 또 다른 길로 여정을 이어가는 나그네의 뒷모습이 보인다.

14년 만에 다시 꺼낸 서울 성곽길

이 글은 2011년 12월 한국관광공사 사보 청사초롱에 실렸던 원고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한 것이다. 당시 직접 걸으며 찍었던 사진 원본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인쇄 지면에 남은 기록을 하나씩 복원해 14년 만에 온라인판으로 되살렸다.

서울 성곽길은 단순한 산책 코스를 넘어, 도시와 역사, 시간과 기억이 만나는 길이다. 서울을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도 낯설 만큼 새롭고, 처음 걷는 사람에게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보게 만드는 길이다.

미디어 환경이 바뀌고 기록을 남기는 방식이 달라졌어도 길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한양도성의 돌과 숲, 문과 계단, 그리고 그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시간이 겹치며 서울 성곽길은 오늘도 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간다.]

이정찬 발행인 ㅣ 여행레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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